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한처음"과 "마지막 때"가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
성경은 말씀이신 성자께서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좁은 시야와 짧은 사고방식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태초를 가리키지요. 이는 이 세상의 시작이라기보다 하느님만이 아시고 주관하시는 절대적 "시작"을 의미합니다.
한처음부터 계신 하느님의 현존과 영향력은 역사의 구비구비를 거쳐,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한처음은 과거 어느 한 순간의 지점으로 사라지지 아니하고, 내내 시작으로 존재하며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신비의 지점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한처음부터 계신 말씀께서 세상에 육화하시어 당신의 사명을 사셨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할, 승천 사건 이후에도 말씀은 우리 가운데 생생히 현존하고 계시지요. 이 세상의 역사는 말씀께서 인류와 함께 걸어오신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예수님의 현존으로 인류는 한처음부터 계신 하느님을 인식하고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났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명하시는 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마지막 때를 언급합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1요한 2,18)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고 여겼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죽음 후 이어진 박해와 '그리스도의 적'의 출현, 그리고 정치사회적 혼란상이 이런 생각을 뒷받침했겠지요. 누구도 모르고 오직 하느님만 아시는 "그날"은 혼돈의 시대를 사는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어떤 면에서는 두려움보다 희망이 되기도 했을 겁니다.
이처럼 이천 년 전에 이미 언급된 "마지막 때"는 아직까지 하느님의 자비로 유예되고 있습니다. 그 때를 모르니 유예 기간도 알 수 없지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이 오기까지 하느님은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1요한 2,20)
기름부음 받은 이는 성령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기름부음은 선택받았음을 의미하며 구원의 보증이 되지요. 한처음부터 시작되어 이어져온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연재해와 천재지변, 기후 위기와 감염병, 반인륜적 범죄와 인간 존엄성 파괴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터지면 우리는 말세를 떠올립니다. 조금씩 고쳐서 나아갈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아예 뒤집어 엎는 것이 더 나을 듯 보일 때도 마찬가지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절망과 자포자기로 망연히 손 놓고 마지막 때를 관망하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 순간까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듯, 우리도 기름부음 받은 이답게 나아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령께서 들려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거룩하신 분께 맞갖는 존재로 자신을 닦아 나가고 있지요.
그러니 오늘이 창조의 첫 날인 듯 온 힘을 다해 찬미하고, 또 오늘이 마지막 때인 듯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주님 현존을 살아가는 소명을 완수해 나가는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일년을 마무리할 때 으례껏 써온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말이 상투어가 아니라 진짜로 생생하게 가슴을 후벼파는 오늘입니다. 지난 2020년, 감염병과 그 여파로, 각자가 지고 있는 십자가로 우리 얼마나 많이 힘들었습니까! 새해를 비추며 저만치에서 희미하게 다가오는 희망이 뜬구름이 아니길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대하는 심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처음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이고, 성령께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설령, 당장 마지막 때가 닥친다 해도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가 구원의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은총과 진리 안에서 기쁨을 끌어 올리며 용기를 내셔도 좋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난 일 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통스러웠던 현실에도 불구하고 "은총에 은총을 받았"(요한 1,16)음에 감사와 찬미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허락해 주신 새로운 생명의 날로 성큼 건너가시길 축원합니다. 2021년에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시고, 말씀 안에 더 깊어지시길 기도합니다. 이처럼 말씀과 기도를 통해 매일 만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새해에는 주님의 복을 차고 넘치게 받으십시오. 한 해 동안 함께 이 여정에 벗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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