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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셉의 해, 우리 시대 요셉을 찾아서] (3)서학수 베드로

dariaofs 2021. 3. 17. 00:10

불편한 몸에도 일궈낸 가정… 하느님은 제게 부족함 없이 주셨죠

 

▲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아내 정윤점씨를 만나 아들을 사제로 봉헌한 서학수씨. 그는 “모든 게 기적”이라고 말한다.


“뇌성마비인들은 수명이 길어야 마흔입니다. 그런데 67년을 살았어요. 제 목뼈는 다 어그러져서 재활치료가 필요하지만 살아있는 게 기적입니다. 어릴 때 폐결핵과 열병을 앓았죠. 혼자 살면서 라면만 먹어 위장병도 걸렸어요. 나 같은 놈이 똑똑한 마누라를 만난 것도 기적이고, 아들이 태어난 것도 기적이에요. 아들이 사제가 되어 하느님의 일꾼으로 쓰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에요.”(서학수 베드로)

부산시 남구 용호동의 한 연립주택. 서학수(베드로, 67)ㆍ정윤점(안젤라, 70, 부산 용호본당)씨 부부가 빛바랜 사진이 꽂힌 앨범을 들여다본다. 사진 속 어린 아들의 얼굴을 매만지는 부부의 손이 늙었다.

“세상에 가정이 있는 남자가 37년 동안 집에 월급봉투를 안 가져다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하.”

어눌한 말투의 남편 서학수씨가 아내를 보며 말한다. 아내는 37년 동안 월급 한 번 안 가져온 남편을 바라보며 웃는다.

“당신의 한결같은 믿음이 우리를 살게 했잖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대로, 하느님이 주시는 대로 살았으니까 이렇게 웃고 살죠.”

서학수씨는 선천성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말할 때마다 고개가 비스듬히 떨궈지지만 얼굴에 늘 미소가 가득하다.

기도회에서 만난 아내와 가정을 꾸리다


“요셉 성인은 목수 일을 하면서 가정도 지키고, 성모님을 위해 뒷바라지도 하셨죠. 요셉 성인은 큰 역할을 하셨는데 지금까지도 드러나지 않고 숨어 계시죠. 저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 그런 일을 못 했으니 요셉 성인이 더 우러러보일 수 밖에요. 오히려 건강해서 돈벌이해 아들과 마누라를 돌봤다면 정신적으로는 덜 힘들었을 겁니다.”

서씨는 걷지 못해 초등학생 때까지 기어 다녔다. 양손에 고무신을 끼고 무릎에 두꺼운 천을 댔다. 두 무릎으로 기어서 학교에 갔다. 집에서 100m 이내의 거리였던 학교 가는 길은 1시간이 넘게 걸렸다. 6년 동안 여동생이 옆에서 도시락과 책가방을 들어줬다. 학교에서는 놀림거리가 돼 친구들을 피해 구석진 곳에서 도시락 뚜껑을 열어야 했다. 온갖 노력 끝에 15살이 되어서야 그는 첫 직립보행을 했지만 중학교는 너무 멀어 진학을 포기했다.

1984년 아내를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 김해의 동네 마을회관 안에서 문방구를 운영하고, 달고나 가게를 하며 살았다. 과자, 담배, 버스 토큰 파는 일을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서씨는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도 밤마다 부산역 앞에 있는 초량성당 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다녔다. 아내도 거기서 만났다.

“기도회가 끝나면 저 사람은 집에 어떻게 가지? 궁금한 거예요. 버스 탈 때까지 기다려주고, 같이 봉사를 다니면서 가까워졌어요. 가족들한테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가문에 똥칠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마지못해 ‘너 알아서 하라’는 게 승낙이었죠.”(아내)

▲ 아들 서정주군의 첫 영성체 날 함께한 서학수씨와 정윤점씨.


뇌성마비 장애인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두 사람은 결혼했지만 월세방을 구할 수 없었다. 돈도 없었지만 뇌성마비 장애인에게 월세를 주고 싶어하는 집 주인도 드물었다. 결국, 장애인복지시설, 여성복지시설을 전전했다. 부부는 진료비가 없어 아기를 출산할 곳을 찾지 못하다가 마리아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구호병원의 응급실로 발길을 돌렸다.

 

서씨에게 아버지의 삶이 시작된 건 양산에 있는 양로원 ‘요셉의 집’에서였다. 서씨는 양로원에서 눈칫밥을 덜 먹기 위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무를 해다주고, 불편한 몸으로 양로원에서 필요한 궂은 일을 찾아서 했다. 아기는 양로원에 있는 할머니들이 돌아가면서 돌봐줬다. 양로원 원장이 우윳값까지 대줬지만 1년 이상 지내기 어려웠다. 친척들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모였다가를 반복했다.

서씨는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아내와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성당에 다닌 일이 전부였다.

“아들이 세 살 됐을 때였어요. 그날은 축성 생활의 날이었는데 아이와 함께 성당에 가서 ‘예수님, 저 봉헌합니다’ 하며, 아이에게 이 말을 따라 해보라고 시켰습니다.”

서씨는 틈틈이 한 교계 출판사에서 만든 사제들의 강론 테이프를 팔러 다니고, 용호성당이 내어준 작은 공간에서 성물 판매소를 운영하며 생계를 이었다. 아내는 사람들에게 수지침을 놔주며 살림살이를 보탰다.

▲ 2016년 3월, 성 요셉 축일에 필리핀의 성 가밀로 수도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아들 서정주씨. 아버지 서학수씨와 어머니 정윤점씨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정윤점씨 제공

사제가 된 아들

2016년 성 요셉 축일, 그의 아들 서정주(안드레아, 성 가밀로 수도회)씨는 필리핀의 성 가밀로 수도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아들이 21살의 나이에 수도원에 입회했을 때 그는 뒤에서 많이 울었다. “지금까지 아버지는 절뚝거리면서 복음을 전했지만 이제 너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편지를 성경과 함께 선물로 건넸다. 그는 필리핀으로 떠나는 아들과 공항에서 헤어지고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서씨는 아들을 수도원에 보내놓고 전국의 성지를 돌아다니며 기도를 했다.

“아들을 떠나보낸다는 슬픔, 평생 해준 게 없다는 슬픔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주말마다 다른 아이들은 차를 타고 가족들이랑 놀러 가는데, 여행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유일한 여행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보스니아의 메주고리예에서 열린 청소년대회에 참가한 일이었다. 학교에서 적금으로 모아둔 돈으로 보내줬다.

서씨는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매일 누워서 묵주기도 50단을 바친다. 그의 대자는 70명이다.

그는 장애가 있는 아버지로서 아내와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지금은 장애가 있다는 것이 정말 큰 은총이고, 은혜임을 깨닫는다”고 털어놨다.

“이 세상에서 잘 살다 보면 많은 것을 보지 못해요.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을 찾아가셨는지…. 밑바닥을 기어 다니며 밑바닥 생활을 해보니 많은 게 보입니다. 사람들은 올라가려고 하고, 높아지려고만 하지요. 하느님은 제게 부족함 없이 주셨습니다.”

서씨의 가족은 한 상에 둘러앉아 식사할 때면 서로에게 이렇게 인사를 주고받는다.

“성인 될 아버지, 어머니! 밥 맛있게 드세요.”

“성인이 될 아들, 밥 맛있게 먹으렴.”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열차 안에서 서학수씨에게 메시지가 왔다.

“인터뷰를 없던 걸로 하면 어떨까요. 정말 이제는 요셉 성인께서 사셨던 것처럼 살고 싶어요. 주님께서만 아시면 되는데….”


이지혜 기자(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