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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생태 영성, 하느님의 눈짓] 16. 애벌레의 부활

dariaofs 2021. 5. 9. 00:10

텃밭에 푸성귀 모종을 심느라 흙을 뒤지다 지렁이를 발견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징그럽다고 놀라기도 했는데, 어설프지만 작은 텃밭에 심고 가꾸는 일을 몇 년 거듭하다 보니 지렁이가 반가움으로 다가옵니다.

자갈이 많은 밭이라도 흙 속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발견하면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일꾼을 무상으로 두고 있는 듯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가장자리 나무 부근에선 손가락 마디만 한 굼벵이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여름 며칠간을 지상에서 맘껏 목청 높이는 매미가 되기 위해서는 7년에서 길게는 17년 동안 땅속의 굼벵이로 살아야 한답니다.

흙 가까운 시골집에서 살려면 개미, 노래기, 돈벌레뿐 아니라 도시에서 온 바퀴벌레에도 놀라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원시 인류가 지구에 나타난 것은 300만 년 되었지만, 곤충들은 이미 4억 년 전부터 생존했다고 하니,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최근에 들린 무례하기까지 한 손님일 뿐은 아닐까요?

굼벵이가 매미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주님의 부활과 닮아 보입니다. 꽃을 따라 팔랑대는 나비를 보면 마음도 함께 평화로워집니다.

그런데 나비로 살게 되기까지 알은 애벌레로 성장하며 여러 번 껍데기를 벗어 변신한 후, 다시 죽은 듯 고치를 튼 번데기를 거쳐,

마침내 그 틀을 찢고 날개돋이 하는 갱신의 과정을 거칩니다.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작가인 트리나 폴러스(1931~ )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노란빛 책에서, 나비가 되려면 애벌레로 사는 것을 기꺼이 포기하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그 포기의 겉모습은 죽음과도 같지만 꽃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나비로 태어나기 위하여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생각나게 합니다. 땅속의 굼벵이와 고치 안의 번데기는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새로움으로 거듭나는 부활의 과정임을 온몸으로 증언하여 보여줍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내 안에 잠재된 하느님 닮음을 포기하고 굼벵이나 애벌레로 주저앉는 영적 죽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듯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례를 죽음으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4)

온몸이 물속에 잠겼던 원 세례의식은 고치 속의 번데기가 나비로 태어나듯,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넘어가는 것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성사는 일상을 지배하는 물질적 가치와 인간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끊어버리는 죽음으로부터, 모든 창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찬미하는 조화로운 삶으로의 부활이라는 의미를 갖고 오늘의 우리 안에 살아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6,4)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산화되어 가는 물리적 육신만을 생각한다면 덧없는 세월이 야속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를 알게 된 우리에게 빠름과 덧없음은 애벌레에서 나비로 날게 되는 그 날로 향하는 하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날 오후 흙을 뒤지다 만나게 된 지렁이에 대한 반가움에서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흙으로 된 땅에서 흙을 보기 어려운 도시 생활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가끔 성당의 앞뜰만큼은 포장을 걷어내고 숨 쉬는 흙을 느낄 수 있는 마당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큰 생명의 순환이 그 아래에 살아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늘땅물벗 홍태희(스테파노) 반석벗(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