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세 돌도 되지 않은 손주 녀석이 아침마다 조그만 가방을 메고 애착 이불까지 챙긴 채 어린이집으로 나서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도 합니다. 얼마 되지 않는 등굣길이지만 녀석은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합니다.
길가의 돌멩이를 집었다가 놓고, 갓 자란 풀을 뜯으려 하고, 플라스틱 조각까지 만져 보더니, 작은 벌레를 발견하곤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 앞에 놓인 세상은 새롭고 경이롭고 아름다운 신기함으로 가득 찬 듯합니다.
어린아이가 보는 놀라운 세상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순수한 본능이 낡아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른의 불행은 자연과 세상을 바라보는 경이로움을 잃은 것에 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 아이가 돌이 지날 무렵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새 생명이 탄생하여 하느님 앞에서 축복을 받는 그 시간은 식구 모두에게 기쁨으로 가득 찬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최소한 그 시간만큼은 세례와 원죄를 연결하여 생각하는 교리적 생각이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파리 몇 마리 잡아 죽였습니다. 개미는 더 많이 밟아 죽였고….” 홍윤숙 시인은 살아가면서 죄처럼 생각되지 않는 죄에 대하여 예민한 감각을 드러냅니다.
불살생(不殺生)을 최고의 계율로 삼아 해충의 살생은 물론, 하루살이가 입으로 들어와 죽을까 봐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호흡하며, 벌레를 밟지 않도록 빗자루로 길을 쓸면서 걸어 다니는 종교도 있습니다.
악업(惡業)을 최대한 줄임으로써 영혼을 가볍게 하여 열반에 이르려는 교리라고 하지만, 죄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보도록 이끌게 됩니다.
교회에서 죄가 강조된 것은 4세기 이후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선과 악으로 나누어 보는 이분법의 세계관은 세상을 타락한 곳으로 보게 되고, 따라서 자연 역시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원죄가 있기 이전에 이미 세상은 창조의 은총으로 가득 찼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은 단죄보다 사랑으로 가득 찬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처음 보는 모든 것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아이의 시선은 ‘보시니 좋았다!’고 감탄하신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시선과 닮아 보입니다.
한 처음부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창조물은 축복에서 비롯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순수함으로 가득한 아이를 보며 조상의 죄 탓에 자동으로 죄인이라는 생각에 먼저 매몰된다면, 아마 죄에 기울어지기 쉬운 인간의 성향을 지적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의도와도 맞지 않을 것입니다.
원죄(original sin)보다 먼저 원복(original blessing)이 있었음을 의식하는 마음은 생명과 자연의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자연의 순환과 맞물려 지금 이 시각에도 계속되고 있는 하느님의 창조는 일회적인 발생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농사용 종자를 한 세대만으로 끝나도록 유전자를 조작한다거나, 물질에 내재한 기본 에너지를 자연적 통제에서 벗어나도록 조작하는 핵기술의 소식을 접하면, 인간의 기술에 의한 비순환적 발생이 얼마나 공허하고 아슬아슬한 것인지 느끼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기억하는 창조 영성이야말로 과학기술을 이해하고 가치를 판단하기 위한 기초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축복으로 가득한 어린아이의 눈에 보이는 온통 아름다운 세상을, 그와 같은 마음으로 경이롭게 볼 수 있으려면 내가 다시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하늘땅물벗 홍태희(스테파노) 반석벗(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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