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길을 걷다 보면 조금의 흙이라도 있는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올라오는 들풀을 만나게 됩니다. 겨울 기운이 미처 가시지도 않았을 때부터 봄 햇볕을 알아채고 올라온 냉이와 달래가 일찌감치 부지런한 아낙들에 의해 먹거리로 올라 계절을 느끼게 해 줍니다.
기지개를 켜는 화단을 정리하면서 들풀들의 이름을 기억해 봅니다. 냉이, 민들레, 봄까치풀, 꽃다지, 쑥, 은초롱, 꽃잔디…. 거기까지는 헤아려 보았는데 그 이상은 이름을 알 수가 없네요.
주말 농촌 생활을 한 지도 10여 년이 되어가지만, 들에 피어나는 들풀들의 이름을 꿰고 있는 친구를 보면 존경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나무 박사 친구의 도움을 받아 마당과 화단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이름을 배웠습니다.
매실나무, 살구나무, 대추나무, 가시오갈피, 헛개나무, 자목련, 배롱나무, 라일락, 불두화, 전나무와 덩굴로 자라는 등나무, 능소화 등 이제 자주 마주치는 울타리 주변 친구들 이름은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침묵의 겨울을 지나고 이들을 돌보고 즐기면서 또 한 해를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대가족을 거느린 듯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노래합니다.
흔히 잡초라고 부르는 것은 이름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저 각자 피어나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것의 이름을 불러 만나게 됨으로써 세상에 의미 있는 존재로 비로소 서게 된다는 시인의 통찰은 성체성사의 신비와도 맞닿은 듯합니다.
2000년 전 살았던 흔한 이름의 한 청년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은 그 청년의 삶을 만났던 평범한 생활인들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000년 후의 시간을 사는 나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로 불린 그 청년의 삶과 개인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그의 행적이 지금 나의 세상살이 안에서 의미를 갖고 되살아나게 됩니다. 잡초 하나를 보고 만지고 맛보며 그것이 ‘민들레’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듯이, 우주 안에서 티끌만 한 나의 존재가 성체성사의 만남을 통해 주님에게도 의미 있는 존재로 불리게 되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어떤 이의 이름을 부르면 그에 대한 기억이 살아납니다. 그것은 단순한 회상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존재가 지금 나에게 다가 와 내 안에 살아있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미사의 핵심 부분에서 우리는 주님을 회상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여 그분을 현실에 살아있게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하느님을 드러내어 예수님처럼 살도록 이끌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 단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창조물을 향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작은 들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창조물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시려는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그 식물의 이름을 바로 찾아 주기도 하므로 두꺼운 식물도감을 동원할 필요까진 없어 보입니다. 봄날 자연을 즐기려 친구들과 교외로 소풍을 나가게 되는 요즘, 어느 집 담장 아래 수줍게 피어난 꽃이나 처음 보는 풀이 있으면 잠시 머물러 이름을 알아보려 합니다.
그리고 나직이 정답게 그 이름을 불러주면 나에게 응답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듯합니다. 서로를 발견하고, 놀라워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 이처럼 은총 가득한 일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하늘땅물벗 홍태희(스테파노) 반석벗(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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