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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셉의 해, 우리 시대 요셉을 찾아서] (4)스타니슬라오 그리기엘 교수

dariaofs 2021. 4. 15. 00:27

스스로 받아들이고 사랑 내어주며, 가족과 성장하는 ‘아버지’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제자로 ‘몸의 신학’ 전문가인 스타니슬라오 그리기엘 교수는 “인간의 인간성은 자기 자신을 받고 내어줌에 있다”고 강조했다.


1934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스타니슬라오 그리기엘 교수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제자로 ‘몸의 신학’ 전문가다.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 창립자이자, 동 대학원에서 ‘철학적 인간학’ 명예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대 생명대학원(학장 정재우 신부)은 지난 3월 12일 그리기엘 교수를 초청해 ‘부성의 의미와 가정 내에서의 아버지의 위치’를 주제로 온라인 특별 강연회를 열었다.

본지는 성 요셉의 해를 맞아 아버지로 살아가는 이들의 영적 성숙을 돕기 위해 그리기엘 교수와의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번역은 정재우 신부의 도움을 받았다.

특별 강연회 내용과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이번 호는 이 시대 부성의 의미를 되짚고, 성 요셉처럼 살고 싶은 아버지들을 위한 코너로 꾸몄다.

- 교회와 사회에서 ‘혼인과 가정’을 언급할 때 부성보다 모성이 더 많이 강조됩니다. 부성은 모성과 달리 어떤 역할과 의미를 지닙니까?

“모성을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어머니가 자녀를 아홉 달 동안 자궁에서 기르고, 젖을 주고 돌봐주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 곁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함께 새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아내에게 잉태된 아기가 자라는 데에 필요한 조건을 마련해야 합니다. 남편에게 선물을 받는 아내가 없으면 남편은 아버지로서 출산을 시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생명을 낳는 사랑의 사건, 즉 선물이라는 신비로운 일을 구성합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동시에 있어야 존재합니다.

모성 없는 부성이란 없고, 부성 없는 모성이란 없는 것이죠. 선물 안에서 두 사람의 역할은 다르지만 이 다름은 불평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환’에서 아버지는 남성의 손과 여성의 손으로 아들을 안아줍니다.

어머니의 배 속에 있는 아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많이 이야기하지만 아버지의 손은 어머니의 손과 함께 아기를 안아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아기를 위한 ‘세상’을 만들어줍니다.

- 특별 강연회에서 생물학적ㆍ경제적 차원에 갇힌 아버지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아버지와 자녀는 수정(受精)이라는 생물학적 의미로만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경제적 의미로만 환원될 순 없는 것처럼 말이죠. 생물학적ㆍ경제적 차원에 갇힌 인간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즉 선물을 받고 타인에게 선물을 줄 수 있는 자주적이고 자유로운 누군가가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인생에서 단 한 번 생물학적으로 태어나고, 생물학적으로 성장하지만 영과 진리 안에서 거듭해서 태어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은 생물학적으로 이미 태어난 사람의 삶을 더 좋고 더 아름다운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줍니다. 사랑이 생물학적 울타리에 국한되면, 아버지는 수정 행위까지만 아버지이고, 어머니도 분만 행위까지만 어머니이겠지요. 그렇다면 수정과 분만은 다소 즐거운 경험 정도로만 환원될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합이 생물학과 경제를 초월하지 못하면, 인간은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결합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즐거움을 주는 결합 정도로 만족해 버리겠지요.”

- 이 시대에 아버지로 사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버지라는 말의 온전한 의미를 실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로 사는 것이 왜 쉽지 않은 것일까요? 사람들이 갈수록 일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위한 사랑 안에서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재화를 더 많이 생산하려고만 합니다. 타인 안에 살지 않는 영은 자신 안에서 존재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타인에게 속하게 해주는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영은 죽습니다.


▲ 지난 3월 12일 가톨릭대 생명대학원이 개최한 온라인 특별 강연회에서 부성의 의미와 가정 내에서의 아버지의 위치를 주제로 발표하고 있는 스타니슬라오 그리기엘 교수.(오른쪽 하단)


- 가정 안에서 아버지로는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요?


“경제적 부양으로만 자녀와 아내에게 자신의 현존을 국한 짓는 아버지라면 그는 원초적인 악을 범하게 됩니다. 주인이야말로 자기 종에게 그렇게 행동하지요. 자녀에게 아버지의 현존은 산파의 성격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즉, 자녀가 자신 안에서 타고난 진리와 선을 낳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는 진리와 선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은 아름답지 않죠. 창조 행위 안에서 시작되는 사랑이 그들 사이에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ㆍ선ㆍ미가 발생되지 않는 삶은 주인과 종의 변증법에 묶이고 맙니다.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이 조장하는 지루하고 시시한 삶으로 변질됩니다.”

-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나요?


“이미 언급했듯이 아버지들이 경제적인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다시 말해, 자녀의 삶에 현존하는 아버지여야 합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떠나면, 아들에게 현존하는 아버지는 복음에서 아버지가 탕자를 기다리듯이 아들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경제적으로 역할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부성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자녀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 영적인 뿌리를 내릴 곳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는 상황의 다스림이 아니라,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다스린다는 것은 그를 더 많이 소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스리는 사람은 전혀 편하지 않습니다.

성부의 다스림을 받는 성자는 포도밭에서 성부가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보내신 죽음 앞에서 피땀을 흘리십니다. 즉,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언제나 ‘파스카’의 성격을 갖습니다.”

- 교수님은 어떤 아버지로 살아오셨는지요.

“1남, 1녀를 두었습니다. 지금 제 인생과 부성을 묵상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사랑 안에서 그들을 위해 일하고 그들과 함께 일했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하느님 말씀의 자비로운 사랑에 저를 맡겨드릴 뿐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3월 19일부터 2022년 6월 26일까지 ‘사랑의 기쁨인 가정의 해’로 선포하셨습니다. 사랑의 기쁨이 충만한 가정을 일구기 위해 이 시대의 부모들은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필요한 것은 사랑과 기도, 일하는 것입니다. 인간성은 부성ㆍ모성ㆍ자녀됨 안에서 일어납니다. 인간의 인간성은 태어남과 새로 태어남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속해서 자기 자신을 받고 내어줌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내어줌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보다 더 위대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 경험은 부성ㆍ모성ㆍ자녀됨의 경험 안에서 일어납니다.

즉, 사랑이라는 사건 때문에 자기 자신이 되는 인간의 삶은 아버지ㆍ어머니ㆍ자녀 세 현존의 합주로서 연주됩니다. 이 사랑은 가정을, 인간이 속한 진리의 아름다움이 일어나는 곳이 되게 합니다.”

- 마지막으로 한국의 아버지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지요.

“한국의 아버지뿐 아니라 모든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잉태된 순간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 아내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한 순간부터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여러분이 자녀의 아버지라는 것을 잊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시작된 순간부터 생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정을 위한 세상을 만들고, 일하고,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정리=이지혜 기자{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