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온유하신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태 12,14)
바리사이들이 말씀과 지혜로는 예수님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분을 없애려 모의합니다. 그들이 사사건건 예수님의 트집을 잡을 때마다 오히려 그들의 오류와 숨은 욕망까지 드러나 버리니 백성들 앞에서 영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겁니다. 그리고 율법과 더불어 자기들의 위상까지 위태해질 것 같아 불안합니다.
이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없앨까" 그 방법을 모색하는 단계지요. 율법에서 명분을 찾은 뒤 이민족의 손을 빌리면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가능할 것이니, 신성 모독과 로마제국에 대한 저항의 단초를 동시에 잡으면 됩니다. 이제부터는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을 몰아세울 기세지요.
"예수님께서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마태 12,14)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물러섬입니다. 그들과 대적해 맞서 싸우거나, 억울함을 토로하며 오해를 풀려 하거나, 그들 편이 되려 돌아서거나 하지 않으십니다. 이해 받지 못한다면 아직 때가 아닌 겁니다. 역사상 하느님의 참 예언자 중 누구도 제대로 이해받은 일이 없다는 걸 그분은 너무도 잘 아시지요. 군중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반드시 하느님 사람이라는 표지는 아니니 예수님은 조금도 조급하지 않으십니다.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마태 12,19-20)
앞서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분은 온유하고 양선하시어 당신을 미워하는 이를 적대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죄인을 무시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어찌 보면 참 약하디 약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존중하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주님의 종이십니다. 그렇다고 마냥 허약하신 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강인한 의지와 실천력의 소유자십니다.
그분처럼 온유하고 양선함을 지향하는 이들은 그런 예수님을 알아보고 사랑하고 따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악은 약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조롱하고 무시하며 함부로 대하지요. 사랑을 알아볼 눈도 없거니와 자기들의 이익에 솜털 하나라도 건드리면 적으로 간주해 짓밟고 제거하려 합니다.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예레 11,20)
예언자의 기도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악에 악으로 맞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걸 넘겨드리고 물러나 기다리지요. 자기 손을 떠났으니 분노하거나 저주할 일도 없습니다. 이제는 자기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손수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는 장면입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려고 밤을 세우셨으므로"(탈출 12,42)
파라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내보내도록 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혹독히 이집트를 치십니다. 이미 노예살이의 억압과 착취로 지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믿고 따라나서지요. 모든 싸움은 하느님께서 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현존으로 한껏 고무됩니다. 사백삼십 년만에 자기들을 찾아오신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쓰라리고 서러웠던 압제에서 자기들을 구출해 내셨으니까요.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맞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우상의 땅에서 물러나오면 됩니다. "밤을 새워" 함께하시는 모습은 흡사 어리고 약하고 아픈 자식을 돌보는 아버지 어머니의 심상입니다. 긴 세월을 거쳐 다시 하느님과 연결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니 이제 자기들을 대신해 싸워 주시는 하느님께서 바다에 막히면 바닷길을 열어 주실 것이고 광야에서 헤매면 새로운 길을 안내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같이 맞받아치고 공격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세상입니다. 손해 정도가 아니라 온갖 모욕과 공격을 감수해야 하고 선의조차 폄훼되고 조롱받는 걸 참아내야 합니다. 선함을 무능과 동일시하기도 하지요. 그러면도 끝까지 자신을 해하려는 이들을 존중하고 돌봐 주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몫입니다. 스승이 그러셨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면서 이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과제인 것 같습니다.
물러남은 패배나 포기가 아니라 믿음과 기다림의 결단입니다. 맞서고 싸우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표현이기도 하지요. 공정하고 진실하신 사랑의 하느님께 모든 걸 맡긴 영혼의 온전한 의탁이고 신앙입니다. 그분이 바다를 열어 주시리라는 것, 길을 내며 이끄시리라는 것을 아는 이의 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물러나 아버지 앞에 머무르시며 아버지의 뜻에 집중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분노, 서운함, 억울함, 두려움, 후회, 자책... 이 모든 걸 우리 대신 재판을 이끄시는 아버지께 넘겨 드리고, 지금 여기 우리에게 허락하신 각자의 파스카를 경축하고 감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몰이해와 저평가, 불신 가운데서도 묵묵히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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