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은총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 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민수 11,4-6)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또다시 주님께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고기며 이집트에서 먹던 생선과 야채들까지 떠올리며 우는 소리를 하는데, 그것들이 "공짜"였다고 회상합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힘들다 해도, 이집트인들에게 착취당했던 시간과 노동력과 생명의 부당한 대가였을지도 모를 그 음식들을 "공짜"로 추억하다니, 주님과 모세 입장에서 보면 참 배은망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듯하지요.
광야 생활 초기에 한창 배를 곯을 때는 하늘에서 이슬과 함께 내리는 만나가 놀랍고 감사했지만 이제는 질린 듯 보입니다. 척박한 광야에서 뭔가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는 건 나무랄 수 없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감사를 잊은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조차 망각한 것 같으니까요. 이 대목에서, 삶의 많은 것들을 주님의 은총으로 누리면서도 어느새 당연하게 여기며 더,더,더 탐욕하고 요구하는 우리에 습성을 성찰하게 됩니다.
복음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발견합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마태 14,17)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온 군중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지만, 제자들 반응은 좀 관료적이라고 할까요? 애초에 군중을 해산해 각자 스스로 알아서 먹을거리를 사게 하자고 제안했을 만큼 그들은 냉정하고 이성적이지요.
사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니, 제자들 계산이 틀린 건 아닙니다. 군중의 수가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었다면 그들에게 딸린 일행까지 합쳐 어마어마한 수의 무리였으리라 짐작이 되니까요.
제자들은 "~~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자라는 부분만 쳐다보고 있으면 늘 그 상태에서 정체될 수밖에 없지요. 완전히 흡족히 채워지는 충만함은 하늘 나라에서나 누릴 수 있는 상태기에, 어차피 이 세상에서는 모자라고 부족하고 공허하기 마련입니다. 마음을 바꾸지 않은 한, 관점을 달리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마태 14,19)
예수님의 태도가 제자들의 그것과 극명히 갈립니다. 그분께는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았지요. 예수님은 비록 미소하고 보잘것없는 양의 먹거리지만 감사히 받아 먼저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올리십니다.
빵의 기적은 논리적 계산에서가 아니라 감사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지금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얼만큼 가졌든 원래부터 내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원래 우리 것이 아니니, 하느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화답송)
이 말씀에는 광야에서 순례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굳은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참밀은 생명의 양식인 성체를, 바위틈의 석청은 꿀같이 달콤한 주님의 말씀을 가리키지요.
주님은 당신을 믿고 의탁하는 이들에게 육체를 지탱할 양식도 주시지만,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 또한 마련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당신 생명을 나눠주신 이상, 당신과 함꼐 영원히 행복하실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우리는 심각한 소유의 불균형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신이 소유한 바를 자꾸 타인과 비교하다 보면 만족과 감사를 잊기 쉽지요. 자칫 오늘 말씀 속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제자들처럼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 "이것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며 스스로를 박탈감과 열등감, 열패감으로 주저앉힐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시는 물적 영적 은총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는 더 충만해질 수도 있고, 더 빈곤해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걸 가졌더라도 탐욕과 불평에 싸여 산다면 여전히 비참할 것이고,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고 찬미한다면 "전부"이신 주님을 소유한, 진짜 복된 존재일 것이니까요.
오늘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포르치운쿨라 전대사 축일을 지냅니다. 저희 작은형제회의 요람인 작디작은 아씨시 천사들의 성마리아 성당이 전대사를 수여하는 대성당급 성당이 된 것을 기념하는 용서(죄사함)의 축제날이지요. 이 축일은 작은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웅변적으로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듯하여도 감사의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넉넉한 수 있음을 깨닫고, 무한경쟁과 투기로 내모는 이 세상에서 숨가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이처럼 고요히 말씀 안에 들어와 기도하는 여러분은 참으로 복됩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감사와 찬미의 제사로 주님께 올려드리며 오늘도 충만하고 흡족하시길 기원합니다. 기적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답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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