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겪는 고통을 치유하시기 위해 환자들을 돌보고, 십자가의 수난을 몸소 겪으셨다. 그림은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하는 기적을 그린 ‘예리코의 눈먼 이의 치유’, 니콜라 푸생 1650년 작, 캔버스의 유채. 출처=가톨릭굿뉴스 |
우리가 겪는 세 가지 차원의 고통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은 단일한 색깔이 아니다. 영어로는 고통을 세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
먼저 육체적인 아픔을 나타내는 ‘페인’(Pain), 정신적인 고통을 나타내는 ‘써퍼링’(Suffering), 그리고 영적인 차원의 고통을 나타내는 ‘애거니’(Agony)가 있다.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주로 이 세 가지 차원의 고통을 동시에 겪는 경우가 많다. 환자는 기본적으로 육체가 아프다.
또한 환자는 육체의 아픔만이 아니라 질병으로 인한 역할의 상실, 관계의 상실, 활동의 상실 등으로 인격이 부서지는 체험, 즉 정신적인 아픔을 겪는다.
나아가 환자 자신이 왜 그런 질병을 앓게 되었는지 고통의 원인이나 이유를 찾지 못할 때, 고통은 몇 곱절 증폭되어 ‘고뇌’로 변한다. 물론 우리가 겪는 고통 중에는 우리를 성장시키는 고통도 있다.
시련에 직면하여 그것을 잘 견디어 낼 때, 우리 영혼은 더욱더 단련되고 강건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쉽게 심리적인 고립감에 빠지며,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이 몇 곱절로 커지는 것을 체험한다.
따라서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적절히 대응하거나 그것에 대한 치유가 필요하다.
인간이 지은 죄의 용서를 위한 보속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겪는 고통을 치유하시기 위해 환자들을 돌보고, 올바른 삶의 태도를 키우도록 가르치셨으며, 십자가의 수난을 몸소 겪으시기까지 하셨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대속의 사랑을 통한 ‘죄의 용서’이며, 동시에 타인의 ‘고통을 치유하는 사랑’이기도 하다.
요컨대, 예수님이 겪으신 수난은 단순히 고통을 겪는 차원(Passion)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사람의 고통에 함께하는 수난, 곧 ‘컴패션’(Compa ssion : 우리말로 ‘자비’ 혹은 ‘측은지심’으로 번역한다)이다.
원래 영어의 컴패션은 라틴어 ‘Compassio’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그것의 어원적인 의미는 ‘함께(com)+고통을 겪음(passion)’, 혹은 고통을 함께 겪음으로써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치유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예수님의 수난인 ‘컴패션’은 ‘고통을 치유하는 사랑’이다. 어릴 적 필자는 가끔 체온이 40℃를 넘나드는 열병으로 고생할 때가 있었다. 이때, 어머니께서 안절부절못하시며 필자보다도 더 아파하셨다.
필자는 고열로 시달리고 있었지만, 나를 위해 아파하시는 어머니의 사랑 덕분에 고통은 견딜만한 것으로 바뀌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에게 닥친 수난을 피하지 않고 모든 고통을 당신 몸으로 온전히 겪으신 이유는 바로 자신의 형제들이 겪는 고통을 치유하기 위함이었다.
‘컴패션의 빵’이 되시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셨다. 이렇게 ‘함께 고통을 겪는 예수님의 사랑’, 곧 예수님의 몸이 ‘컴패션의 빵’이 되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로 말미암아 상처 입고 아파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치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의 또 다른 의미는 하느님을 향한 ‘보속의 희생 제사’이다. 인간이 지은 ‘죄의 용서’를 위한 희생 제사 그리고
‘고통을 치유하는 사랑’ 외에 예수님께서 봉헌하신 십자가 희생 제사는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상처받은 하느님 아버지의 성심을 위로하고 우리의 죄악을 보속하기 위함이었다.
하느님 아버지는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로서 가장 흠숭 받아야 마땅한 분이시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죄악으로 하느님은 인간에게서 버림받은 분이 되셨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저지른 죄악을 보속하고 하느님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모든 이의 맏형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필리 2,8)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희생 제사는 ‘감사’ 안에서 봉헌되었다.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1코린 11,24) 제자들에게 그 빵을 나누어주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고 있을 때의 상황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결코 감사드릴 정황은 아니었다.
그때는 예수님이 가장 신뢰하던 당신 제자들로부터 배반당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 최후의 만찬 후에 당신이 어떤 수난을 겪게 될지도 이미 알고 있던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의 아픔과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리면서도 하느님께 ‘감사의 희생 제사’를 봉헌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희생 제물이 되었고,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최상의 위로와 보속으로 변모되었다.
‘감사의 마음’으로 순명하신 희생 제사
이렇게 ‘감사의 마음’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신 예수님의 희생 제사 덕분에 우리가 겪는 고통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물로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감사의 모범’을 따라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필리 4,6) 이 서간을 쓰고 있을 때,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자신의 고통과 희생을 하느님께 감사의 예물로 봉헌하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리도 고통과 역경에 처할 때, 한탄과 원망이 저절로 터져 나올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감사의 희생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요컨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음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슬프게 하거나 혼란케 할 수 없는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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