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언니 오빠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 나면 혼자 집에 있고 싶지 않아서 어머니를 따라 밭으로 가곤 했다.
두 고개를 넘어가야 우리 밭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큰 고무 대야에 점심때 먹을 밥과 몇 가지 반찬을 담은 뒤, 머리에 똬리를 얹고 그 위에 큰 고무 대야를 이고는 한 손으로 중심을 잡으신 후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밭으로 향하셨다.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그냥 좋았다. 그래서 혼자 밭고랑에서 조개껍데기 몇 개로 소꿉놀이해도 재미나게 놀 수 있었다. 점심때 즈음이면 논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께서 밭으로 오셨다.
어머니는 고무 대야에 싸오신 밥과 반찬들을 펼쳐놓으셨다. 나는 일한 것도 아닌데 밥맛이 꿀맛이었다. 밭에서 나의 간식은 싱아와 찔레순, 삘기였다.
내가 목마르다고 하니 아버지께서는 산자락으로부터 밭으로 이어진 개울로 나를 데려가셨다. “아가, 이 물이 약수여”라고 가르쳐 주셨다. 나는 물가로 얼굴을 가져가 삐죽 입술을 내밀어 물을 먹었다. 내 입에도 달았다.
물소리, 바람 소리, 어머니의 호미 소리, 딱따구리와 비둘기와 풀벌레 소리 말고는 없는 밭에서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것은 해가 질 즈음 부엉이가 ‘부우엉’하고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아가, 가자!”라고 어머니께서 다시 고무 대야를 머리에 이고 왼손으로 내 손을 잡으신다.
작은 돌부리에도 잘 넘어졌던 내가 항시 걱정되셔서 그 손을 놓지 못하셨던 것이다. 사실 어머니의 이 염려는 쉰 살이나 먹은 나에게 아직도 “아가,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조심혀”라는 안부 인사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니 나는 항상 내 오른손으로 어머니의 왼손을 잡고 걸어가는 여정에 있다. 촌뜨기가 도심에서 봄을 맞이하려니 엔간히 땅 냄새가 그리운가 보다.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려니 가장 먼저 땅과 어머니를 새기고 있다.
발 없는 마음 어머니와 밭으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리운 마음이라도 그 길을 따라 걷도록 잠시 잠깐 내버려 두었더니 제 고향인 땅과 어머니를 금세도 찾았네.
믿는 내 마음이 찾는 고향이 하나 더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머문 기도의 자리이다. 아파트 방 한편에 장궤틀 고여 앉아 눈 감은 채로 주님을 따라가는 기도의 자리이다.
주님께서 초대하셨고, 주님께서는 이곳에서 당신의 생각을 보여주신다. 당신이 가실 길을 생각하시는데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게 되는 시간이다.
그러니 그분이 기도하시는 그곳에 함께 머무는 그 기억이 단지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함께한 기억의 자리가 되도록 예수님께서는 나를 그 작은 장궤틀을 도구 삼아 당신이 머무시는 산을 오르도록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시는지 알아차릴 수 있도록 다 보여주신다. 당신이 가실 길에서 겪게 될 어려움을 아시지만, 예언된 하느님의 아들이 바로 당신이심을 아시는 그분께서는 자신이 끝까지 가기를 바라신다.
기도하는 많은 이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지만 다른 사람들 때문에 고난을 즐겨 받을 사람은 없다.
예수님은 그 길을 받아들이신다. 사명을 받아들인 사람의 모습은 어떨까?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세상을 떠나시게 될 일을 알게 된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과 달라졌다.
무엇에 대한 반영인가?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반영하는 변모이다. 그것이 어떤 환한 빛인지 그려낼 수는 없어도 다만 그분 가슴에 이미 가시관을 끌어안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나도 담대해진다.
나에게는 또 다른 그리운 자리가 있다. 택배 노동자들과 함께 촛불을 드는 자리, 기후위기 피켓을 드는 자리, 삼척화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자리, 탈핵을 외치는 자리, 서울역과 남대문 노숙인들과 함께하는 자리이며, 전쟁을 반대하는 군중 속의 자리이다.
세상이다.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의 자리이다. 함께하면 ‘평화’의 빛깔로 변화되어 번지게 되는 자리이다.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은 오늘 당신 그리움의 대상인 ‘나’, ‘우리’를 기다리신다. “보소서,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적혀있나이다.”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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