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하며 오고 가는 길에, 문득 올려다본 빌딩들에 환히 밝혀져 있는 불빛을 보게 되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 시간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뭔가를 하고 있다. 산처럼 높은 건물에 층층이 빛을 밝혀, ‘나 여기 있소’라고 말하는 듯하다.
한 층이라도 더 높고 멋진 건물을 세우려는 듯 빌딩들이 무섭게 자리하고 있다. 솔직히 별로 아름답지 않다. 여기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야경’이라는 표현으로 저 불빛들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문득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인 「꽃들에게 희망을」이 떠오른다. 저자인 트리나 폴리스의 글과 그림은 그 이미지의 상징들이 독자들 안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오버랩시켜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제목이 「꽃들에게 희망을」이지만,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이 가고 있는 길을 따라가다가 드높은 기둥에도 오르게 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가니까 가야 할 것처럼 여기며 따라 오른다. 거기서 운명의 노랑 애벌레를 만나는데 이들은 오르던 일을 멈추고 내려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다가 줄무늬 애벌레는 자신이 오르다가 내려온 그 기둥을 떠올리며, 가보지 못한 기둥 꼭대기에 대한 갈망으로 사랑하는 노랑 애벌레를 떠난다. 줄무늬 애벌레가 다시 오른 그 기둥은 다른 애벌레를 딛고 오른 애벌레 기둥이었다.
자신이 남을 딛고 오르지 않으면 남이 나를 딛고 오르는 치열함 속에서 줄무늬 애벌레는 마침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줄무늬 애벌레가 그 위에서 목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다른 애벌레들에게 밟히지 않기 위해서 올라오는 다른 애벌레들을 떨어뜨리고, 밟아야 한다는 현실이었다. 수천 개의 기둥이 그저 애벌레들의 기둥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곁에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를 발견한다. 나비의 시선에서 뭔가 익숙한 사랑을 느끼며, 그는 기둥을 내려오기로 결심한다. 내려오는 동안 그는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혼자 내려와 노랑나비를 다시 만나고 나비의 인도로 고치를 만든다. 그리고 멋진 호랑나비가 된다.
오늘 나는 저 높은 빌딩들을 보며 이 동화책이 표현한 애벌레 기둥이 떠올랐다. 서로 더 높이 건물을 짓고 살아가면서 거기에 뭔가가 있는 것으로 믿고 싶은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 한 번 볼 여유 없이, 풀 한 포기 자랄 땅도 허용하지 않고, 본래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자기 본질을 잊고, 고치를 만드는 기억을 망각해 가는 듯하다.
책의 저자 트리나 폴리스는 동화책의 마지막 장면에 많은 애벌레들을 그리며 애벌레마다 작은 나비를 그려주었다. 모든 애벌레들은 나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고마운 배려다.
우리는 지금 전쟁과 쿠데타로 수많은 생명들이 죽음의 위협 속에 놓이게 된,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이러한 전쟁과 쿠데타가 그 나라들만의 이념차이가 아니라 또 다른 힘 있는 배후 국가들의 권모술수로 인한 것임을 보게 된다.
짓밟기 위해 올라오는 것을 허용하는 저 위의 애벌레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전쟁의 고통스러운 얼굴과 예수님의 얼굴이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짓밟으려는 사람들을 놔두신다. 그들에게 힘과 말로 겨루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일관하시며 길을 가신다.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으로 죽음의 상황을 만든 것은 힘 있는 이들과 지켜보는 우리들이지만 우리 모두는 가야 할 길을 모르는 듯해 보이고, 정작 길을 제시하는 분은 그분이시다.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주님의 마지막 여정은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이에게 희망의 길이 되어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태초부터 우리 모두를 창조하시며 ‘부활’할 수 있는 희망을 심어주셨다.
이 희망으로 오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겠다.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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