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5월 4일 광주무등경기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함께한 윤공희 대주교.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금남로
수원교구장으로 10년을 보내고 1973년 10월, 나는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로 승품했다. 그렇게 시작된 광주에서의 삶은 내 개인에게도, 한국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내게 1980년 5월 19일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해 5월 18일, 광주의 상황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급박하고 심각했다. 하루가 지난 19일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광주 시내 금남로에 위치한 가톨릭센터 6층이 교구청 집무실이었다.
그날 금남로에는 수많은 군인들이 청년들을 잡아다가 옷을 벗기고, 길바닥에 엎드려 놓고 몽둥이로 때리거나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금남로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 창문마다 사람들이 모여 대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이 야속하게도 내 집무실에서도 훤히 보였다.
군인들이 험악하게 시민들을 탄압하고 있는 그 혼란 속에서, 가톨릭센터 건물 모퉁이 골목 사이로 몽둥이를 든 군인 둘에게 둘러싸인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40년이 넘도록 각인된 그의 모습, 한 마디로 처참했다.
겉옷은 이미 벗겨졌고 몸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인 모습이 드러났다. 하얀 와이셔츠에는 빨간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아, 저 사람은 어서 응급치료를 받아야 할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두려움에 휩싸여 차마 내려갈 수 없었다. 내려가면 그 군인들이 나도 마구잡이로 때릴 것만 같았다. 순간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아,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그 강도 맞은 사람을 비켜서 지나가는 사제가 바로 나로구나’ 그런 양심의 가책이었다. 그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활동이 시작됐다. 처음엔 전남도청에서 정시채 부지사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회의에 참석했더니 신부들을 비롯해 각계각층 십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어떤 이는 ‘지금 젊은이들이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대체 여기서 뭣 하고 있느냐’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이후 계엄군의 소준열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강경진압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파면된 윤흥정 장군의 후임으로 온 사람이었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광주 방문
나는 사제품을 받을 때 사목표어를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정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새로 표어를 정할 수 있다고 해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1984년 5월 4일, 그분의 방한 첫 공식 일정이 광주 방문이었다. 그해 5월만큼은 광주에도 슬픔과 아픔보다는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때 교황님을 태운 ‘포프 모빌’에 동승했던 나에게 한 외국 추기경이 ‘아니 대한민국이 마치 가톨릭국가인 것처럼 보이네!’하며 감탄하는 말을 했다.
정리 남재성 기자(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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