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앙 돋 보 기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26.사회 공동체 재건을 위하여- ⑤인간 존중과 배려를 실천하는 이들

dariaofs 2022. 6. 13. 00:05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사랑받을 존재

 

▲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사랑받는다고 느낄 수 있도록 서로를 포용해야 한다. 인도 콜카타에 있는 성 마데 데레사 수녀상. 【CNS 자료 사진】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한국영화사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비롯해 4개 부분의 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필자는 이 영화가 어떤 점에서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의미와 재미를 주고, 적잖은 메시지를 담은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지만 필자에게 와 닿았던 점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이 영화를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계층 간의 불평등과 양극화가 인간관계의 갈등을 유발하는 기본적인 요소임을 전제하면서도 그 관계에서 존중과 배려가 결여될 때, 심각한 갈등으로 치닫게 됨을 보여준다.
 
‘박 사장’의 운전기사인 영화 속 주인공 ‘기택’이 자신을 고용한 ‘박 사장’을 살해하는 동기는 ‘선을 넘는 행위’ 즉 인간에 대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를 망각하고 상대를 무시하고 모멸했기 때문이다.
 
상대의 소중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를 망각할 때, 인간관계는 허상일 수밖에 없다.

영화 기생충의 박 사장과 운전기사 기택

우리 현실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상실한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서로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대하는 것, 즉 ‘나에게 얼마나 효용성이 있는가’에 따라 관계를 맺는다.
 
‘내가 너에게 이만큼 돈을 지불했으니 너는 나에게 기생하여 사는 사람이다’, 혹은 ‘내가 너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네 가정과 사업이 유지될 수 있다’는 식의 생각들, 즉 상대의 소중함을 잊고 이해관계에 속박되어 사람을 사물처럼 대한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 인격적인 관계, 상생의 관계는 추락하고 ‘갑과 을’이라는 서로 기생하는 관계로 변질되고 만다. 이 관계에서는 나의 유불리에 따라 상대를 어제든지 해치울 수 있다는 적대감 또한 내재되어 있다.

필자는 2019년 인도 콜카타에서 거행된 세계 병자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
 
이때, 성녀 마더 데레사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시설 중 콜카타 프레담 지역의 한 시설을 방문했는데, 영화 ‘기생충’에서 보여주는 인간관계와는 대비되는 모습, 즉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환대하는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다.
 
그곳에 머무는 분들의 처한 환경이나 시설들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시설 규모에 비해 수용 인원이 많아 강당같이 큰 공간에 침대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고 이마저도 부족해 복도의 자투리 공간까지 들어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눈빛은 전혀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방문객 일행들을 밝고 유쾌하게 대해주시며 먼저 인사하고 안수를 청했다.
 
또한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은 침상에서 내려와 방문객에 대한 가장 큰 존중의 표시로 고개를 숙이고 우리 일행의 신발을 만져주었다. 그리고 팔 한쪽을 잃으신 어느 어르신은 우리를 위해 고운 목소리로 멋지게 노래를 불러 주었다.
 
각자의 처지에 맞게 그분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존중과 환대를 우리에게 베풀었다. 누가 위로와 위문을 받아야 할 처지인지 서로의 위치가 뒤바뀐 느낌이 들었다.

콜카타에서 체험한 존중과 환대의 모습

몸도 성치 못한 분들이 세상에 대한 분노나 자신에 대한 신세 한탄을 이겨내고 타인을 배려하고 환대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생겼을까?
 
그곳에서 일하시는 성녀 마더 데레사의 후예인 ‘사랑의 선교회’ 수녀님들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시는 수녀님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밝고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듯이 보였다.
 
마치 천사들이 하늘에서의 일을 잠깐 접고 이 세상에 파견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모습이었다. 수녀님들이 일하는 방법도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까 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랑으로 섬기는 마음으로 일할까 고민하는 자세가 돋보였다.
 
일례로 그곳에서는 세탁기 없이 모두 손으로 빨래하고 있었는데, 세탁기를 살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머무시는 분들의 처지를 기억하기 위해 손빨래를 하며 옷에 사랑의 온정을 담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세탁기로 서둘러 빨래를 마치고 쉬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겨지지만, 그곳 수녀님들은 자신의 일에 사랑을 채우고 있었다.
 
이렇게 그곳 시설에 머무시는 분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의 선교회’ 수녀님들의 존중과 배려,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그분들이 받은 존중과 배려를 방문객인 우리들에게 베풀었다고 여겨졌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기에

어려운 환경에도 견디며 살 수 있는 이유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 덕분이다. 반면 풍족한 환경에서도 서로에 대한 적대감으로 힘들어하는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존중과 배려의 마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 존엄성의 원리’에 대한 판단 기준은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사랑받는다고 느낄 수 있도록 서로를 포용해야 한다.
 
보상받기 위한 사랑이 아니라, 인간은 소중하고 존엄하기에 조건 없이 보호받고 배려받으며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모두에게 햇볕과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즉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기에 그 사랑이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도록 우리를 독려하고 사랑의 마음을 촉발시킨다.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