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공동선의 토대
▲ 사랑의 본성은 루카 복음 15장의 ‘잃어버린 것들의 비유’에서처럼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고 회복시키는 데 있다. ‘착한 목자’, 3세기, 프레스코, 프리실라 카타콤, 이탈리아 로마. |
구약 성경의 곳곳에서 하느님을 고아와 과부, 당시 사회적인 약자들의 보호자로 소개하고 있다. “하느님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신명10,18)
“하느님께서는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쏟아 놓는 하소연을 들어 주신다.”(집회 35,17) “힘없는 이, 당신께 몸을 맡기고 당신께서는 고아에게 친히 보호자가 되십니다.”(시편 10,14)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은 당시 고대사회의 보편적인 신관에서 벗어난 매우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당시에 신은 그 사회의 지배층, 즉 왕과 귀족, 사제 등 힘 있는 사람들의 대변자로 여겨졌다.
예수님 역시 구약 성경의 사회적 약자 보호 정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리고 예수님은 다섯 부류의 사회적 약자, 즉 헐벗은 사람, 굶주린 사람, 집 없이 떠도는 사람, 병든 환자,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언급하시며 그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을 때,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서게 될 ‘최후 심판’에서 단죄를 받게 될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마태 25,31-45)
구약의 정신과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의 특별한 연대를 추구했던 전통에 따라 교회는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해 중단 없는 활동을 해 왔다.
요컨대 가난한 이들, 소외받는 이들, 어느 모로든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으며 그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 그리스도교 사랑의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늘 강조해왔다.(「새로운 사태」 182항)
약자를 우선 돌보는 일이 ‘하느님의 일’
구약 성경이나 예수님께서는 왜 이토록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것이 우리 각자가 실천해야 할 그리고 우리 사회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우선적인 사명으로 강조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선 약자들을 돌보는 일이 ‘하느님의 일’(Opus Dei), 즉 하느님께서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모든 이의 아버지요, 사랑이시다. 사랑의 본성은 루카 복음 15장의 ‘잃어버린 것들의 비유’(잃어버린 은전, 양, 아들)에서처럼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고 회복시키는 데 있다.
우리 시선으로 볼 때, 양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행동은 무모하게 보인다. 또한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탕진했을 뿐만 아니라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작은아들’을 용인하고 그에게 잔치까지 베푸시는 아버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고통받는 존재들에게 초연할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는 ‘도덕주의’, ‘능력주의’, ‘공리주의’와 같은 세상적인 논리를 초월하여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는 데 온 마음을 기울이신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피조물의 상처와 아픔에 함께한다. 따라서 우리 역시 하느님 사랑의 본성을 지니고 있기에,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에 우선적으로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교황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 특수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단 시간적으로 조금 빠르게 혹은 조금 늦게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도달할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함에도 희귀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영적, 심리적인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인 고통도 겪고 있다. 제약회사들은 경제적인 이익이 되지 않는 치료약 개발 투자에 소극적이며, 정부에서도 소수의 권리에 대해 정치적인 표 계산으로 그들을 외면하기 쉽다.
이런 현실에도 희귀병 연구를 하는 어떤 교수가 다음과 같이 인터뷰한 내용은 참 인상적이다. “몇십만 몇백만 중의 한 명 꼴로 나타나는 희귀병에 대해 정부나 제약회사가 쉽게 투자하지 못하는 현실을 저는 이해합니다.
많은 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희귀병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는 곳에 국민 세금을 투여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의견에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희귀병을 앓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그 병고를 그들이 대신 앓고 있을 수도 있음을 유념했으면 좋겠습니다.” 참 공감이 가는 말씀이다. 우리 자신이 불행의 처지에서 제외된 것에만 안심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주는 황금률
교회에서 말하는 공동선의 원리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라는 뜻이다. 사회 전체의 이익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주라’는 ‘황금률’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이 사회에 가장 중요한 공동선이 아닐까!
여러 이해 당사자를 두고 판단하거나, 과반수의 이익이 다른 모든 관심사를 앞선다고 주장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전적으로 부합된다. 따라서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언급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은 공동선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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