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열전

[신 김대건·최양업 전] (70) 최양업 신부의 선종

dariaofs 2022. 11. 26. 00:08

착한 목자 최양업 잃은 슬픔, 조선 교회를 덮다

 

▲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15일 배론 신학교에서 68㎞ 떨어진 한 교우 집에서 선종한 후 가매장되었다가 그해 11월 초 베르뇌 주교 주례로 배론에 안장됐다. CPBC 제작 드라마 ‘탁덕 최양업’ 중 최양업 신부가 과로로 결국 쓰러진 장면이다.


교회 재건을 위해 몸을 바치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최양업 신부가 1860년 9월 3일 죽림에서 리브·르그레즈와 신부 등에게 보낸 편지)

1859년 겨울, 한 주막에서 포졸들과 외교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반나체 상태로 눈 쌓인 밤을 헤매다 겨우 목숨을 구한 최양업 신부는 1860년 경신(庚申)박해를 피해 경남 언양 간월산 죽림에 숨어 지냈다.

 

좌포대장 임태영이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 적개심으로 조정의 명령 없이 사사로이 일으킨 이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돼 9개월간 지속됐다. 이 기간 포졸들은 천주교인들의 재산을 착복하기 위해 약탈과 방화를 서슴지 않았다.

 

부녀자들은 겁탈당했고 교우촌은 풍비박산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끔찍한 재해가 조선을 덮쳤다. 콜레라로 전국에서 4만 명 이상이 죽었다. 신자 30여 명도 포함됐다. 기근으로 교우촌은 포졸들과 도둑들의 먹잇감이 됐다.

박해가 잦아지자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 낮에 30~40㎞ 길을 걸어 교우촌을 찾았다.

 

최 신부는 밤에 교우들에게 고해성사와 미사를 집전하고 날이 밝기 전에 몰래 그곳을 떠났다. 최 신부의 복사였던 조화서(베드로)는 “이 시기 최 신부가 쉰 날은 한 달에 나흘 밤을 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최양업 신부는 교회 재건을 위해 밤낮없이 신자들을 찾아다녔다. 그의 헌신으로 경상도 남부 지방 교우촌들은 안정을 회복하게 됐다. 신자들은 성사로 힘을 얻었고 폐허가 된 교우촌을 재건하거나 새로운 삶의 자리로 옮겨갔다.

 

최 신부는 경상도 지역 교우촌 방문을 마친 후 경신박해로 연락이 끊긴 베르뇌 주교를 만나기 위해 한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한양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사목지에 들러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푸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하다

그러던 중에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15일 배론 신학교에서 66~70㎞(170~180리) 떨어진 한 교우 집에서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40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선종했다. 사망 원인은 과로와 장티푸스였다.

푸르티에 신부는 최 신부가 임종하기 8~9시간 전에 도착했다. 다행히 사죄경(赦罪經)을 하고 병자성사를 주기에 늦지 않았다. 하지만 최 신부는 의식을 거의 잃어 마지막 고해성사를 할 수 없었다.

 

최 신부는 숨을 거둘 때까지 무의식 속에서 “예수 마리아”를 되뇌었다. 그의 임종을 지킨 이는 푸르티에 신부와 최 신부의 복사 조화선, 그리고 교우 집 가족들이었다.

최양업 신부가 어디에서 선종했는지 정확하지 않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의 최양업 신부 약전에는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 선종지에 이견이 있는 까닭은 그의 죽음에 관한 구체적 목격 증언이 없기 때문이다.

 

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임종을 지켜봤던 푸르티에 신부조차 최 신부의 선종지를 “저의 산(배론)에서 약 17리외(lieues- 프랑스 거리 단위로 1리외는 약 4㎞) 떨어진 어떤 교우 집”이라고 적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문경 선종설은 문경이 배론에서 170여 리 길에 위치하고, “문경에서 소고기를 잘못 먹어 약국을 하는 평창 이씨 교우 집에서 돌아가셨다”는 최양업 신부 조카 최상종(빈첸시오)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진천 선종설’은 배티 교우촌을 중심으로 구전돼 온 전승으로 ‘배티에서 선종했다’는 설과 ‘문경에서 병을 얻어 서둘러 진천으로 와서 선종했고, 그곳에 가매장 되었다가 11월에 배론으로 옮겼다’는 설이 있다.

 

이에 청주교구 배티성지 누리집에는 “진천의 한 공소(진천 원동 혹은 미확인, 경상도 문경 진안리 주막설은 잘못임)에서 선종했다”고 소개하고 있으며, 안동교구는 경북 문경 진안리 오리티에 ‘최양업 신부 선종지’인 진안성지를 조성해 놓았다.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어디엔가 매장되었다가 1861년 11월 초 베르뇌 주교 주례로 배론에서 장례 미사를 봉헌하고 이곳에 이장한 것은 분명하다.

 

일부 학자들은 최양업 신부 시신을 배론으로 이장한 것을 두고 ‘임시 매장설’을 주장한다.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장티푸스 증세를 보이다 선종한 최 신부의 시신을 임시로 매장했다가 “시신의 물이 다 빠진 다음” 배론으로 옮겼다는 주장이다.

 

개인적으로 이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돌림병이 무서웠다면 최 신부의 묘를 그대로 두면 되지 굳이 5개월 만에 묘를 도로 파서 시신을 문경 혹은 진천 배티에서 68~170여㎞ 떨어진 배론까지 들고 옮겨야 할 이유가 없다.

베르뇌 주교가 최양업 신부의 묘를 배론으로 이장한 결정적 이유는 아마도 최 신부의 매장지를 교우들이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베르뇌 주교는 자칫 최 신부의 묘가 유실될 수 있는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배론으로 이장했을 것으로 본다.


                   ▲ 배론 성지에 조성돼 있는 가경자 최양업 신부 묘소이다.


착한 목자를 잃다

최양업 신부가 어디서 선종했는지, 처음 어디에 묻혔는지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이다. 분명한 것은 최양업 신부가 배론에서 약 17리외 떨어진 어떤 교우 집에서 선종했고 그곳에 묻혔다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일을 유일하게 “6월 15일”이라고 기록한 페롱 신부는 “신학교에서 약 12리외 떨어진 한 작은 교우촌”에서 최 신부가 선종했다고 한다.

 

그는 최 신부의 복사인 조화서(베드로)로부터 이 말을 직접 들었다. 조화서 역시 최양업 신부의 임종과 매장을 직접 지켜본 목격 증인이다.

 

최양업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시신을 매장한 푸르티에 신부와 또 그와 함께 있던 조화서의 말을 직접 들은 페롱 신부의 증언대로라면 최 신부의 선종지와 첫 묏자리는 결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큰 교우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최양업 신부의 묘는 배론으로 이장된 후에도 상당 기간 버려진 상태였다.

 

“그 귀한 시체는 배론학당 뒷산 중턱에 안장한 후 병인년 군란 후 수십 년 동안은 실전(失傳)되었더니 10여 년 전에 다시 찾은 때에는 무주고총과 같이 그 분묘 위에 수목이 성립한 것을 벌목개초하여 지금까지 그곳에 계셔 부활 기약을 기다리시더라.” -정규량(1883~1952) 신부의 증언을 주재용(1894~1975) 신부가 기록해 「배론성지」에 수록한 글-

이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베르뇌 주교의 선견지명과 용단이 없었다면 최양업 신부의 시신은 어찌 됐을까. 아마 ‘배론에서 17리외 떨어진 어떤 교우 집’이라는 기록만 남아서 전해질 뿐 최양업 신부의 묘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이었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애도했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선을 행하기 위해 그가 지녔던 보기 드문 덕성, 지칠 줄 모르는 열성, 재능, 능력 등등 선교지가 그를 잃음으로써 모든 것을 잃었다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정말 엄청난 고통이다. 그는 모두에게 애석한 마음을 갖게 했다. 당장에는 아무것도 그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애통해 했다.

최양업 신부와 절친했던 페롱 신부는 “하느님은 우리 불쌍한 조선을 좀 가혹하게 취급하시는 것 같다. 조선에 새 선교사가 오면 하느님은 즉시 우리 중에서 순진한 사람을 데려가신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메스트르 신부가 돌아가셨다. 올해는 더 귀중한 사람을 거두셨다.… 그의 죽음은 모든 교우를 매우 슬프게 만들었다.

 

그들의 애도는 당연하다. 왜냐하면, 토마스 신부의 지식과 그의 강론을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것이 어렵게 될 때 그들의 슬픔은 더욱 커질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라고 슬퍼했다.

조선 교우들의 비통함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굳이 애써 찾지 않아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리길재 기자(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