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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최고참 현광섭(춘천교구) 신부, 9월 전역 예정

dariaofs 2023. 7. 15. 00:45

군종 사제로 27년 “감사할 따름” 군 소명 의식 강조

 

 

그리운 임관 동기 신부들. 현광섭 신부는 1997년부터 임관해 사제 생활 대부분을 군에서 보냈다. 현광섭 신부 제공


군종교구 최고참 사제인 현광섭 신부(육군 대령)가 오는 9월 30일 전역한다. 법적으로 보장된 휴가일 등을 빼면 실제 군 생활은 사실상 7월 초에 끝난다.

1993년 8월 사제품을 받아 올해로 서품 30년째. 1997년 군종 사제로 임관됐으니, 사제생활 대부분을 온전히 군에서 지냈다. 햇수로 27년에 이른다.

 

역대 군종 사제 중 현 신부보다 오래 군 생활을 한 사제는 1981~2009년 28년간 복무한 청주교구 고 유병조(2015년 선종) 신부뿐이다.

 

현재 마지막 임지로 지상작전사령부를 관장하는 선봉대본당 주임으로 사목 중인 현 신부는 그간 태극ㆍ자운대ㆍ무열대본당, 육군본부 등지에서 두루 사목한 군종교구의 산증인이다.

 

2004년엔 이라크 자이툰부대 1진으로 파병돼 전황 속에 8개월을 지냈다. 6월 21일 현 신부와 이야기를 나눴다.

전역을 앞둔 27년 차 군종 사제의 첫 마디는 ‘감사’였다. “이 순간까지 살아온 원동력이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하느님의 보호하심과 수많은 신자들의 보호, 그리고 기도 덕분”이라며 “내가 잘 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축하받을 입장이 아니라, 감사할 입장, 그저 면면히 감사할 따름”이라고 덧붙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는 “어떻게 하면 최선을 다하는 군종신부가 될 수 있을지 고민했던 초임 때”라고 했다.

 

그는 “초임 때 정말 열심과 정성이 뻗쳤다”며 “나이트클럽 직원처럼 라이터 판촉물을 제작해 돌리기도 하고, 화장실이나 생활관에 명함을 만들어 부착하고, 군용 담배에 명함을 꽂아 돌리고,

 

장병들 좋아하는 캐러멜을 명함과 함께 돌리는 등 ‘별짓’을 다 해봤다”고 말했다. 모두 주님을 알리는 그만의 땀나는 노력이었다.

이라크 파병 때는 저항 세력의 공격으로 심각한 목숨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2004년 9월 3일 이라크로의 첫발을 디딘 후

 

첫 임무는 1진 1제대 1단위 16호 차량 선탑자로 이동하는 것이었다”며 “저항 세력의 공격이 이어지는 속에 나흘간 1200㎞를 이동할 때 머리카락이 쭈뼛 서면서 철모를 뚫고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 ‘신부님, 기도해 주세요’라는 운전병의 외마디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며 “그 운전병은 신자도 아니었고, 그냥 나와 함께 나흘 동안 안전하게 이라크 주둔지에 도착만 하면 되는 그런 관계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라크에 있는 동안 나라가 있고 평온하게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됐다”며 “중동에서 (이라크) 주교님과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을 만난 것 또한 경이로운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병사들에 대한 휴대폰 사용 허용, 일과 후 자율시간 확대 등 변화된 군내 환경이 사목에 저해요인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답했다.

 

현 신부는 “타종교의 경우, 다양한 예배 방식, 문화가 있고 콘텐츠가 있는 찬양방식 등으로 늘 새로움을 모색한다”며 “그런데 가톨릭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똑같고 하나인 교회라고 강조하지만, 이는 자기 색깔을 내며 사는 요즘 젊은이들과는 너무 먼 분석”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군 사목을 넘어 현대의 사목 현장은 변화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현실이 되었다”고 말했다.

최고참 군종 사제는 후배 군종 사제에게 소명 의식을 강조했다.

 

“군종 사제는 일반 사제로서의 정체의식만 가지고는 활동할 수 없다”며 “국방이 무엇이고, 군대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군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면 사목 대상인 군인들과 괴리감만 늘려가는 사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 의미에서 선교 사목에 대한 뚜렷한 정체의식과 소명감이 필요하며, 그래서 군복도 입는 것이고 머리도 짧게 깎아보는 것이고, 훈련 때 얼굴에 먹칠하고 함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신임 군종 사제들에게 귀에 쏙 들어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자신의 교구에서 멀리 떨어져 주변에 동료 신부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자신의 영적 성장과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잘 활용하기 바란다”면서 “제발 밥 굶지 말고,

 

맨날 배달 음식 시켜 먹지 말고 요리를 배워서라도 밥 잘 챙겨 먹기를 신신당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두 가지만 잘해도 아주 훌륭한 군종 사제가 될 것”이라고 덕담을 건넸다.

현 신부는 친정인 춘천교구로 돌아간다. “이제까지는 군종 사목이라는 성소를 갖고 살았다면, 이제는 춘천교구 성소를 갖고 살아야 한다”며 “4년 차 춘천교구 신부로, 막 보좌 신부를 마친 마음으로 임하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현 신부는 “언젠가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싶다”며 “거의 본당 사목 영성만을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고자 하는 신학생들에게 세상은 넓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전역을 앞둔 소감은?
“1993년 8월 25일 춘천교구 신부로 서품된 후 26년간 군사목이라는 특수사목을 해 왔다.

 

아마도 선배 군종신부였던 청주교구 유병조 신부 다음으로 긴 세월을 군종신부로 살아왔다. 부족하고 모자란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온 원동력이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분명히 내 덕은 아닌 듯하다. 하느님의 보호하심과 수많은 신자들의 보호와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내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잘난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지켜주고 보호해주신 하느님과 신자들 덕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축하받을 입장이 아니라 감사할 입장이다. 그저 면면히 감사할 따름이다.”

-군종사제로서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26년간 살면서 수많은 추억과 기억들이 지나간다. 초임 때 열심과 정성이 뻗쳐서 어떻게 하면 최선을 다하는 군종신부가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나이트클럽 직원처럼 라이터 판촉물을 만들어 돌리기도 하고, 화장실이나 생활관에 부착할 명함을 만들기도 하고, 군용담배를 사서 명함을 꽂아 돌리기도 하고, 캐러멜을 사서 명함과 함께 돌리기도 하는 등 별에 별짓을 다 해보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심심찮게 전화도 오고, 도움을 청하는 편지도 받고 했다.


청량리역에서 아마도 마지막을 고하는 전화를 하는 듯한 병사를 찾아 밤새도록 유흥가와 홍등가를 찾아 돌아다닌 적도 있다. 어느 전방부대에 전입을 했는데 시내 문구점에 들렀더니 사장 눈빛이 반짝였다.

 

성당으로 돌아왔을 때 그 사이 전화가 와있었다. 군종병이 전화받은 내용은 ‘혹시 전에 어느 부대에 계시지 않았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문구점을 찾아갔더니 (자신이) 예전 춥고 배고픈 전방 군생활 시절 중대 군종병이었다고 하더라.


또 대구 근무 시절 하루는 야구를 보러 야구장을 방문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잠시 후 나와 눈이 마주친 중년의 남자가 자신을 어느 부대 누구라고 소개하고 현재 어느 성당의 청년분과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예전 사진첩을 뒤져보니 그 사진에 그 친구가 있었다.”

-이라크 파병 중에 위험한 고비와 위기를 겪었다는데...
“당시 파병 반대 여론 탓에 파병이 6개월간 지연되었다. 출국하는 가까운 군 공항까지 버스로 30분 거리를 헬기로 이동할 정도였다. 이라크 전황은 그리 안전하지 않았다.

 

8월 24일 나의 서품 축일 바로 전날 이라크로 출국했다. 쿠웨이트 전진 기지에서 적응훈련을 마친 후 9월 3일 이라크로의 첫발을 디뎠다.


임무는 1진 1제대 1단위 16호 차량 선탑자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4일 동안 1200km를 장비와 인원과 함께 이동하는 것이었다. 첫 이틀은 안전지역이어서 주간에 이동하고, 후반 이틀은 위험지역이라 야간에 이동하게 되었다.

 

그 야간에 이동하는 날, 우리를 향해 저항 세력의 공격이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면서 철모를 뚫고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운전병의 외마디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신부님, 기도해 주세요!” 그 운전병은 신자도 아니었다. 그냥 나와 함께 4일 동안 안전하게 이라크 주둔지에 도착만 하면 되는 그런 관계였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도착한 이라크 아르빌에 우리는 맨손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는 동시에 기지를 세우고 작업에 몰두했다. 이라크에 있는 동안에 나라가 있고 평온하다는 것에 대한 감사하게 되었다.

 

또 매일 많은 이라크 사람들이 한국군 캠프에 와서 도움을 청했다. 특히 의료 혜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왔다.  이라크에서 만난 현지 교구의 주교님과 사제, 수도자들도 있었고, 그들을 목자로 두고 사는 신자들과의 만남도 있었다.

 

그 머나먼 중동의 나라에서 주교님과 사제와 수도자와 신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8개월 간 이라크에 있다 2005년 5월에 귀국했다.”

-휴대폰 사용 등 개인의 인권이 강조되는 시점에서 군 사목의 변화는?
“앞으로 더 많이 개방되고 변화될 것으로 판단된다. 인권과 복지가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개인의 감정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오늘날 이미 구시대적인 사고방식과 이념과 가치는 저물어가고 있다.

 

큰 흐름이기에 막을 수 없다. 단지 휴대폰이든 무엇이든 건전하고 순기능적인 문화가 형성되지 않아 문제다. 하지만 그 휴대폰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젊은이들을 우리는 다시 휴대폰을 통해 연결 고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현대인들과 휴대폰은 분리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SNS 등을 통해 이 세대와 만나야 한다. 요즘 유튜브가 한창 유행이다. 흔히 ‘짤’이라고도 하는데 손가락을 수없이 넘기며 짧게 제작된 영상을 본다. 그런 반면에 우리는 여전히 고전적이고 올드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고 있는 듯하다. 아니 알면서도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면 그것이 천주교가 아니라고 할까봐 겁을 먹은 것 같다.

 

타종교의 경우 다양한 예배방식, 문화가 있는 방식, 콘텐츠가 있는 찬양방식 등으로 늘 새로움을 모색한다.

 

그런데 가톨릭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똑같고 하나인 교회라고 강조하면서 좋은 것이라고 하지만 자기만의 색깔을 내며 사는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너무 멀다.

 

군사목을 넘어 현대의 사목 현장은 어떤 변화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현실이 되었다.”

-후배 군종사제에게 주고 싶은 말은?
“사제라는 정체성이 강할수록 교회가 부여한 소명에 대해 순명하는 마음으로 특수한 사목에 더 매진할 것이다. 군복을 입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군종신부라는 소명이 무엇인지 더 고민하게 되고 성찰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농민사목하는 사제가 자신의 사목 대상인 농민을 모른 채 사목할 수 없다. 노동사목하는 사제가 노동자의 심리와 노고를 모르면 노동사목하는 사제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해외선교 사목을 나간 사제가 자신이 활동하는 지역의 역사와 그 원주민을 모른다면 수박 겉핥기식의 사목하게 된다.


군사목하는 군종 사제가 국방이 무엇인지, 군대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군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면 그 또한 사목 대상인 군인들과의 괴리감만 늘려가는 사제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 사목에 대한 뚜렷한 정체의식과 소명감이 필요한 것이다. 일반 사제로서의 정체의식만 가지고는 활동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군복도 입는 것이고 머리도 짧게 깎아보는 것이고, 훈련 때 얼굴에 먹칠하고 함께 해보는 것이다. 현장에서 함께 고뇌를 나눌 때 동질감이 생기고 비로소 그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염출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군복은 단순한 유니폼이 아니라 수의라고 한다. 군복이라는 수의를 입고 사는 군인들과 함께 하는 군종 사제 또한 제의라는 수의를 입고 사는 사람들이니 군인과 비슷한 점이 참 많이 있다.

 

참호가 무덤이라고 하는 군인과 미사하면서 죽으면 천국 간다고 하는 우리들의 속담과 너무나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새로 임관한 사제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새 술은 새 부대에. 옛날 이야기로 이 시대를 살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 떠날 때가 되어 떠납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 후배들에게 맡깁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조언하기보다는 맡기는 마음으로 떠납니다.

 

이제 2선으로 물러나 후원하고 응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저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군사목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과거를 사는 우리보다 지금과 현재를 사는 여러분들이 분명히 더 많은 경험과 추억을 만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신의 교구에서 떨어져, 그리고 주변에 동료 신부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자신의 영적 성장과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잘 활용하기 바랍니다.

 

또 아주 중요한 충고인데 밥 굶지 말고 맨날 배달 음식 시켜먹지 말고 요리를 배워서라도 밥 잘챙겨 먹기를 신신당부합니다. 위의 두 가지만 잘해도 아주 훌륭한 군종 사제가 될 것입니다.”

-춘천교구로 돌아가는데...
“4년차 춘천교구 신부로 돌아간다. 막 보좌 신부를 마친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성소를 가지고 임하면 될 것이다.

 

이제까지는 군종사목이라는 성소를 가지고 살았다면, 이제는 춘천교구 성소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산 것처럼 앞으로도 하느님의 보호하심이 있으리라 믿으며 돌아간다.”

-군종교구와 군종 사제들, 신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이 생각날 것이다. 보고 싶을 것이다. 한 동안은 나도 힘들 것이다. 참 좋은 주교님과 참 사랑스러운 군종신부들이었고, 참 의리 있고 듬직한 군종교구 신자들이었다.

 

좋은 추억만 간직하고 떠난다. 당신들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시집 장가가는 모습까지 보았으니 정이 들 만큼 들었다.

 

언제든지 오며가며 지나가는 길에 들러서 옛날 이야기하면서 밥 한 끼, 차 한 잔 할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며 떠난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언젠가는 신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고 싶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목들이 존재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거의 본당 사목 영성만을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이제 사제가 되려 하는 신학생들에게 세상을 넓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려 주고 싶다.”

이상도 기자(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