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순교자 첫 시복과 시성한 두 교황
비오 11세, 평양교구 설정하고 한국 순교자 첫 시복
제259대 교황 비오 11세는 즉위한 해인 1922년 메리놀외방전교회에 조선 평안도에 대한 포교권을 위임했다. 이듬해 5월 패트릭 번(훗날 초대 주한 교황사절) 신부가 책임자로 입국, 4년 뒤 평양지목구의 초대 지목구장으로 부임했다.
이어 2대 지목구장이 된 존 모리스 몬시뇰은 1932년 첫 한국인 여자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를 창립했다.
비오 11세 교황은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기해(1839)·병오(1846)박해 순교자 79위를 시복했다. 앞선 신해(1791)·신유(1801)박해 순교자들이 먼저 복자품에 오르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당시 가난한 식민지 백성인 한국 신자들에게 이역만리 로마에서 열리는 시복식에 참석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시복’이란 용어조차 정립되지 않은 터라 언론에선 ‘순교자 표창식’(동아일보 1925년 3월 19일 자)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칠순을 넘긴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등 프랑스 선교사 2명 만이 시복식에 참여했다.
두 주교는 수행원도 없이 그해 3월 부산에서 여객선을 타고 출발, 일본·중국·홍콩·싱가포르에 이어 이집트 수에즈운하와 프랑스 마르세유를 거쳐 3개월 만에 로마에 도착했다.
「경향잡지」 편집을 맡은 한기근 신부도 “한국인이 한 명이라도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에 5월 로마로 떠났다. 때마침 메리놀회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 후 성지순례차 로마에 들른 장면·장발 형제도 시복식에 참여했다.
한기근 신부는 이후 「경향잡지」에 시복식 풍경을 ‘로마 여행일기’로 연재했다. 시복식은 가톨릭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한국을 ‘세 차례’(?) 방문한 교황
1978년 즉위한 제264대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과 처음 접촉한 계기는 이듬해 일어난 이른바 ‘오원춘 사건’이었다.
영양군청이 불량 씨감자를 보급한 데 항의하던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청기분회장 오원춘이 수사기관에 의해 납치, 고문당한 일이다.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는 이 사건을 폭로하고, 유신 정권에 항의하다 추방됐다. 그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개입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추방을 취소하면서 두봉 주교는 2달 만에 복귀했다.
이어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교황 최초로 한국을 사목 방문,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복자 103위를 시성했다. 바티칸이 아닌 우리 땅에서 신앙 선조들이 성인품에 오른 뜻깊은 일이었다.
교황은 또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청년과의 대화에서 젊은이들이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의 폭압을 알리겠다’며 가져온 최루탄 상자를 흔쾌히 받기도 했다. 방한 일정에 없던 소록도도 깜짝 방문해 한센인을 격려했다.
교황은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 때 다시 방한해 남북 간 화해를 바라는 평화의 메시지를 낭독했다. 이후로도 남북정상회담이나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등 큰 사건 때마다 한국에 메시지를 전했다.
2001년 3월 23일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청립 로마 한인 신학원 축복식을 거행했다. 교황의 ‘세 번째 한국 방문’ 격이었다. 로마와 전 세계에 한국 교회 위상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전달수(안동교구 원로사목 성사전담) 신부
정리=이학주 기자(가톨릭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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