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체 먹여 살려온 식물에 무자비한 폭력 행사하는 인간
식물, 산소 만들어 생명 숨 쉬게 하고
자신을 동물 등에 먹이로 내어줘
인간 횡포에 다른 생태계 훼손
제주도 서귀포에서 동쪽으로 조금 벗어난 곳에 효돈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에 사는 한 지인이 작은 식물원을 만들었는데 시간 되면 들러달라는 초대를 받아 지난 12월에 찾아갔다.
내비게이션으로 근처까지 가기는 갔는데 눈에 띄는 간판도 없어 주변을 헤매다가 전화 통화를 하고 겨우 찾았다. 이 식물원의 주인은 그리 부자도 아닌데 돈을 벌 생각이 아니라서 관광객을 많이 받지 않고 하루에 한정된 인원만 인터넷으로 예약받는다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겨울이라 그런지 식물원인데도 꽃이라고는 한 송이도 피어있지 않았다. 나무들도 몇 그루 되지 않았고 들판의 나지막한 잡풀들이 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여러 종류 식물의 씨앗을 사방에서 구해 모종을 키우고 제대로 싹을 틔우면 마당에 옮겨심는다고 한다.
입구 쪽에 작은 카페가 있어 차 대접을 받았는데 카페 서쪽으로 크고 시원한 창문이 나 있었다. 전혀 특별할 것도 없이 풀만 무성한 정원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창문 한쪽 꼭대기에는 멀리 눈 덮인 한라산 백록담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광경이 하도 평화스러워 나도 모르게 궁둥이를 붙이고 한참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식물원을 만든 주인의 의도도 특별히 아름다운 꽃나무를 심어 구경꾼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로 가득 찬 현대인들이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머물고 쉬어가는 장소가 되었으면 하고 만들었단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첫째 날 빛을 만드시고, 둘째 날 물과 하늘을 만드시고 셋째 날 나무와 풀을 만드셨다. 나무와 풀은 땅 위에 출현한 첫 번째 생명체들이다.
식물은 빛과 물만으로 자신의 생명을 자라게 하고 산소를 만들어 땅 위의 다른 많은 생명을 숨 쉬게 하고 자신을 먹이로 내준다. 수명을 다한 다음에는 흙 속에 파묻혀 땅을 비옥하게 하고 또 다음 세대의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거름이 된다.
식물은 모든 생명체의 못자리다. 인간들은 식물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동물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고의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동물은 식물에 큰 은혜를 입고 삶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지구생태계에 제일 뒤늦게 등장한 막내 인간이 맏형이자 대선배인 나무와 풀들을 너무 우습게 여긴다. 인간과 모든 생명체를 먹여 살려온 풀과 나무에 우리 인간들은 아주 무자비하고 무례한 폭력을 행사해 왔다.
내가 사는 제주에서도 나무와 숲이 점점 사라지는 모습에 내 가슴이 옥죄어 오고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을 느낀다.
그런데 언젠가 제주교구 원로 신부님과의 대화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1948년 4·3의 무장봉기가 일어난 후 군대와 경찰은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중산간 마을들을 차례로 포위하여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해안가 마을로 강제 이주시켰다.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1974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1986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됐다. 2002년 제4대 제주교구장에 착좌했으며 이후 2020년까지 교구장직을 맡았다.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상임위원 및 사회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과 사회주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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