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례 상 식

[전례의 길잡이] 2. 하느님의 말씀을 떼어 먹여주는 강론(2) -하느님 백성의 예배-

dariaofs 2013. 8. 3. 20:25

작성자 :  

<강론의 쇠퇴와 복구>

 

초대교회 시대부터 교부들이 한 수많은 강론이 우리에게 전해지는데, 요한 크리소스토모, 아우구스티노, 레오 대교황,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이름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중세부터 탁발수도회의 교의적이고 윤리적인 설교가 유행하면서, 강론은 지방말에 따른 독서와 복음의 반복, 설명, 공지사항, 기도와 노래 등으로 채워진다.

 

내용의 변질과 함께, 복음 선포 뒤 회중석 중간의 높은 강론대로 이동하거나, 강론 전에 제의를 벗고 강론 뒤에 제의를 다시 입거나, 강론 전후에 십자성호를 긋는 등의 행동이 나타났으며, 강론이 점차 미사와 분리되고 마침내 밋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일으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4년 ‘전례헌장’을 통하여 시대의 변천으로 없어졌던 강론을 다시 복구하며 “전례주년의 흐름을 통하여 거룩한 기록에 따라 신앙의 신비들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규범들을 해설하는 강론은 전례자체의 한 부분으로서 크게 권장된다.”(52항)고 가르친다.

 

‘전례헌장’ 7항의 초안에는 강론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표현하였다가 오해를 피하려고 바꾸었지만(이홍기, 미사전례, 175쪽 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사제의 강론은 하느님 말씀 선포의 연장’ 이라하며 그 중요성을 더욱 분명히 밝힌다(1154항).

 

 

<영원한 말씀에 비추어 공동체의 구체적 오늘을 바라보는 강론>

 

강론의 중요성에 대하여 베아 추기경이 1956년 국제 사목전례회의에서 말한 것은 의미가 깊다.

 

“우리가 믿는 것처럼, 거룩한 전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생명의 빵이 신비롭게 결합하는 것은, 집전하는 사제가 그 두 기능을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성사의 직무자인만큼 말씀의 직무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빵이 살 중의 살이 되고 영 중의 영이 되듯이, 전례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살 중의 살이 되고 영 중의 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전례운동과 성서운동이 만나고 혼합됩니다.

 

 

미사를 거룩하게 드리고 거룩한 빵을 쪼개는 사제가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쪼개어주는 데 실패한다면 그는 반쪽만 사제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강론을 복구한 것은 성경 봉독에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구체적 상황에서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이다. 독서자나 부제가 봉독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말씀의 식탁에 놓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말씀도 쪼개져서 살아있는 공동체의 지금 여기, 오늘, 현재라는 구체적 현장에 알맞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집전 사제의 임무이다. 집전 사제는 거룩한 빵을 축성하여 영성체로 나누어주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봉독한 다음 강론으로 나누어주어야 한다

(전례신학, 175쪽 참조).

 

결국 강론은 성경의 메시지를 현시화함으로써 신자들이 자신의 삶이 오늘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현존과 그 활동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강론은 거행되는 신비를 이해하도록 이끌고 사명으로 초대하는 것이어야 하기에 강론의 임무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베네딕토 16세, 주님의 말씀, 59항 참조).

 

사제는 의무로 규정되어 있는 주일과 의무축일의 강론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한다(로마 미사경본 총지침, 66항 참조).

 

아울러 신자들과 함께 드리는 평일 미사에세도 신자들이 그날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날의 열매 맺기를 할 수 있도록 짧은 묵상을 제시한다면 신자들의 영신생활은 깊어질 것이며 크게 칭송받을 것이다.

 

사목자들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분배하면서 또한 그날의 말씀도 강론으로 풀이하여 풍요로운 전례 공동체로 키워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