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7월 22일 가해 연중 제16주간 화요일(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dariaofs 2014. 7. 22. 01:30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는 복음서에서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루가 8,2)로 묘사되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그 밑에 서 있었으며(요한 19,25),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일요일 이른 아침에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마르 16,9),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린 사람도 그녀이다(요한 20,11-18).

복음서에 언급된 또 다른 마리아는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루가 7,36-50)와 성녀 마르타(Martha, 7월 29일)의 동생인 베타니아의 마리아, 그리고 클레오파(Cleophas)의 아내 마리아(4월 9일)가 있으나, 위의 죄 많은 여자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전승에서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믿어왔다. 중세 시대에 있었던 3명의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 속에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사도 성 요한(Joannes)과 약혼한 사이였다고도 한다.

 

성령 강림 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님과 성 요한과 함께 에페수스(Ephesus)로 가서 전교하다가 그곳에 묻혔다고 전해온다.

 

강론   :   (요한 20,1-2.11-18)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 20,15)."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왜 우느냐고 묻자 그 사람을 동산지기로 생각했고,

그가 예수님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을 모신 곳을 말해 주면

자기가 모셔 가겠다고 그 사람에게 말합니다.

(마리아는 그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서 미리 무덤을 준비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안전한 곳으로 예수님을 모셔 가겠다고 말하는 마리아의 말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을 걱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하셨을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탄생 장면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7)."

"구유에 뉘었다."는 외양간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는 여관에는 빈 방이 없었다는 뜻이고,

이제 곧 출산하게 될 산모를 사람들이 외면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요셉과 성모 마리아에게 돈이 없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돈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출산을 위해서 외양간으로 간 것은 돈이 아니라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성모 마리아와 요셉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와 요셉은 그 상황이 얼마나 서글프고 서러웠을까?

 

그렇게 태어나신 예수님인데

돌아가신 뒤에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시신을 애타게 찾았고,

자기가 모셔 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처음부터 성모 마리아와 요셉을 알고 있었고,

그 부부를 사랑했다면,

그리고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옆에 있었다면

아마도 분명히 방을 구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외양간에서 출산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릅니다.

예수님보다 적을 수도 있고, 성모님과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하는 말은 “만일에 그랬다면...” 그랬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모님과 예수님을 어디에, 어떻게 모실 것인가?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제대로 모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말은 거창하고 화려한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을 모셔야 할 방은 각자 자신의 '마음의 방'입니다.

 

첫째, 깨끗해야 합니다.

쓰레기만 가득 차 있는 방에 모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쓰레기 같은 이기심과 욕망들을 모두 치워 버려서

마음의 방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의 방에 성모님과 예수님을 제대로 모실 수 있습니다.

 

둘째, 성모님과 예수님을 모시려면 '성모님과 예수님만' 모셔야 합니다.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방'에는 악령들도 잘 들어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경고입니다(루카 24-26).

이단 종파나 사이비 종교나 이상한 신념에 빠져 있는 사람들 중에도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많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손님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방을 예수님께 드리는 일은

지나가는 손님에게 잠시 내주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분이고, 우리는 관리인입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어머니이신 분이고, 우리의 어머니이신 분입니다.

 

넷째, 정성으로 모셔야 합니다.

사랑은 곧 정성입니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욱더 지극 정성으로 모시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바로 정성입니다.

 

예를 들면, 미사를 드릴 때 제대를 대충 아무렇게나 차려서

미사 경본과 성작과 주수병이 마구 흩어져 있는 채로 미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사랑도 정성도 부족한 일이고, 불경죄를 짓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이 혼자서 기도를 바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충 아무렇게' 라는 말은 정성의 반대말도 되고 사랑의 반대말도 됩니다.

 

다섯째, 나중이 아니라 '지금'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라는 말은

'나중에 때가 되면 그때부터 세상 끝날까지'가 아니고,

'지금부터 세상 끝날까지'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묵시 3,20)."

예수님께서 '지금' 문을 두드리고 계시니

우리가 예수님을 모실 방을 준비해야 하는 때도 '지금'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