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Joannes Baptistae)는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인 즈가리야(Zacharias, 11월 5일)와 성모 마리아(Maria)의 친척인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11월 5일)의 아들로서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아인 카림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가브리엘 천사의 탄생 예고를 통하여 그동안 수태하지 못하던 엘리사벳에게 잉태되었다(루가 1,5-25).
그는 서기 27년경까지 유대 사막에서 은수자로 살았고, 30세가 되었을 때부터 요르단 강가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설교하기 시작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오실 때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고는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며 말렸다(마태 3,14). 그리스도께서 갈릴래아로 떠나신 뒤에도 그는 요르단 계곡에서 자신의 설교를 계속하였다.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왕은 세례자 요한의 언행과 또 군중들에 대한 요한의 권위를 두려워하던 중에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들어 그를 사해의 마캐루스 성채에 투옥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은 옳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헤로디아는 간계를 꾸며 딸 살로메에게 그의 목을 청하도록 하여 요한은 결국 참수 당하였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쿰란 공동체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은 6월 24일이고, 수난 기념일은 8월 29일이다.
강론 : (마르 6,17-29)
<세례자 요한의 죽음>
복음서 저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비판했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내용만 보면,
요한은 종교박해를 받고 순교한 것은 아닌 것으로,
즉 남의 사생활을 비판하다가 죽은 사적인 살인 사건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비판한 것은
회개를 선포한 그의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요한이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은
메시아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헤로데가 요한의 비판이 듣기 싫어서 요한을 죽인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박해한 것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의 죽음은 사적인 살인 사건이 아니라 '순교'입니다.
왕의 권력을 이용해서 공적으로 죽였다는 점에서도
요한의 죽음은 종교박해로 인한 순교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요한이 죽은 것은 그의 패배로, 그리고 헤로데의 승리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눈에는 요한의 승리와 헤로데의 패배로 보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헤로데는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임으로써 멸망의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복음서에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지만,
우리는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사탄의 영향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귀 들렸다는 뜻이 아니라, 사탄이 원하는 쪽으로 살고 있었다는 뜻.)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하는 장면에서 세 번째 유혹은
자기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마태 4,9).
헤로데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죽인 것은
올바르게 살라는 말씀은 안 듣고
세속의 영광을 추구하라는 사탄의 말을 들은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길과 사탄의 길이라는 갈림길에서
헤로데는 하느님의 반대쪽에 있는 사탄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사탄이 유혹했더라도 선택은 인간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도 인간에게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는데(마르 6,20),
이 말은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생각하고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말은 아닙니다.
아마도 헤로데는 요한을 예언자로 생각하고 존경하는
백성들의 여론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또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의 바로 뒤에 나오는 "(그를)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마르 6,20)." 라는 말은,
헤로데의 내적 갈등과 망설임을 나타냅니다.
요한을 그냥 죽일까, 조금 더 살려둘까, 라는 망설임...
또 요한을 보호해 주었다는 말은 실제로 그를 보호해 주었다는 뜻은 아니고,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말리고,
살인을 조금 뒤로 미루었다는 뜻일 뿐입니다.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을 보호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막은 것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미신적인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면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미신적인 두려움...
"요한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 라는 말은,
요한이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뜻일 뿐이고,
경청했다는(새겨들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살인 정범과 종범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살해당하는 상황을 보면서도
침묵을 지키거나 구경만 한 사람도 모두 똑같은 공범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헤로데와 헤로디아와 그들의 딸과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요한을 죽인 박해자이고 살인범입니다.
모든 신앙인에게는 예언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는 일이 많습니다.
만일에 정치적인 이유로, 또는 사상과 신념에 따라 한쪽 편을 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을 선이라고, 악을 악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더라도 악을 악이라고 말한다면
세례자 요한의 뒤를 따르는 일이 되고,
박해받는 것이 무서워서 침묵을 지킨다면
헤로데의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과 같은 공범이 될 것입니다.
악을 악이라고 말하는데도
"종교인은 정치에 간섭하지 마라." 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싫어서 정치를 핑계 대는 사람들이고,
사실상 헤로데 같은 사람들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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