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9월 23일 가해 연중 제25주간 화요일(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dariaofs 2014. 9. 23. 01:30

 

오상의 성 비오 신부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동부의 베네벤토(Benevento) 대교구에 속한 피에트렐치나에서 아버지 그라초 포르조네(Grazio Forgione)와 어머니 마리아 주셉파(Maria Giuseppa Forgione) 사이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 다음날인 26일 프란치스코(Franciscus)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려서부터 매일미사에 참례하고 기도와 묵상을 즐겨하였다. 10살 때에 그는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부모에게 말하였고, 아버지는 아들의 신학교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일하러 갔다. 12살 때 첫 고해와 첫영성체를 한 그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마을의 사립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03년 1월 6일 16세의 어린 프란치스코 포르조네는 모르코네(Morcone)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같은 해 1월 22일 수련복과 함께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뒤 1907년 1월 27일에 종신 서원을 하였고, 1910년 8월 10일 23세의 나이로 베네벤토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품을 받은 후 1년 정도 지난 1911년 9월 7일 그의 두 손, 특히 왼손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18년까지 거의 매주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오상(五傷, stigma)의 흔적이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15년 10월 10일부터였다. 그는 오상이 보이지 않도록 해 주기를 예수님께 간청하였고 얼마 동안은 별 흔적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915년 11월 6일 군에 소집되어 1918년 수도원에 복귀하기까지 성 비오 신부는 1년 혹은 6개월의 병가를 여러 차례 받았으며, 1918년 3월 16일 기관지염 때문에 군복무 불능 판정을 받고 3월 18일 산조반니 로톤도(San Giovanni Rotondo)의 수도원에 복귀하였다.

성 비오 신부는 1918년 9월 20일 그의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오상이 찍힌 것을 알게 되었다. 오상은 처음에는 작은 상처에 지나지 않았으나 몇 달이 지나자 점점 커졌고, 그 후 그는 아물거나 덧나지도 않는 오상의 고통을 50년 동안 겪게 되었다. 그가 오상을 받았다는 소문은 급속히 퍼져 산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성 비오 신부는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되었다. 1923년 6월 17일에 그는 수도원 내의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되 외부인은 참례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고, 그에게 오는 편지의 답장도 금지당하였다. 미사는 6월 2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봉헌하게 되었으나, 그 뒤 교회의 제재는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 1931년 6월 9일에는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집행이 정지되었고, 미사도 경당에서 복사 한 명과 봉헌하도록 제한되었다. 이틀 뒤 이 명령을 전해들은 성 비오 신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순명하였다.

격리된 기간 동안 성 비오 신부는 미사집전과 기도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가 1933년 7월 1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25일부터 남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고, 5월 12일부터는 여자들에게도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애정으로 1947년 5월 19일에 '고통을 더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라는 병원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 병원은 1956년 5월 5일에 완공되어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1960년 8월 10일 성 비오 신부의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축하식이 거행되었고, 1963년 1월 22일에는 수도복 착복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리고 1968년 9월 20일 그의 오상 5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성 비오 신부는 1968년 9월 22일 오전 5시에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인 23일 월요일 새벽 2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26일 지하성당에 안치되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충만한 성 비오 신부는 인간 구원을 위한 자신의 성소를 충실히 살았다. 그는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신자들을 영성적으로 지도하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였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거행에 충실했으며, 특히 미사성제를 통하여 그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영성적인 충만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곧 삶이었다. 그는 모든 의지를 신앙 안에서 세웠고 모든 행실을 신앙 안에서 행하였다. 그는 열성적으로 기도생활에 투신하며 많은 시간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보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신앙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알 수 없는 뜻마저도 받아들이게 인도하였다.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또한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비판과 오해를 풀어나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어가는 1971년 2월 20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는 카푸친회 장상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비오 성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비오 신부님이 얻은 명성을 보십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게 미사를 지내서 그렇습니다. 새벽부터 잠중까지 고해소에 머물며 고해를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쉽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성 비오 신부의 거룩함과 명성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더욱 커졌다. 그래서 1969년부터 그에 대한 시복시성이 절차가 시작되었다. 1982년 11월 29일 그는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시복 추진에 대한 '장애 없음'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5월 2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6월 16일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30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예수님의 오상을 받아서 '오상의 비오 신부'로 불리는 그는 또한 '파드레 비오'(Padre Pio)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를 존경하여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 '비오 신부님'이란 의미이다.

 

강론   :   (루카 8,19-21)

 

<'그들'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누가 예수님께 알리자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와 형제들이고,

그들은 내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만 가족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 가족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만' 내 가족이고,

다른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다." 라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가족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기본 사상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가족답게)

말씀을 듣고 실행하여라."가 예수님 말씀의 진짜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가족이지만

말씀을 듣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가정에서 벗어나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가톨릭교회' 라는 말은

'보편적인 교회' 라는 뜻입니다.

'가톨릭교회 - 보편적인 교회' 라는 말은

민족, 인종, 남녀, 신분, 계급, 이념, 직업 등에 따른 차별이 전혀 없는,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사람의 교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보편적인 교회이기 때문에 자격 제한 같은 것은 일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라고 가르칠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입니다.

이 말은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인데,

'인간 세계'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홍익인간 사상은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나라'가 건국이념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어떤 차별도 없는,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지...?)

 

또 우리에게는 '사해동포주의 사상'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동포이고 한 가족이기 때문에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오직 사랑만 해야 하다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홍익인간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념과 체제가 다르다고 미워하고 적대시하고...

인종이 다르다고 싫어하고...

이런 이유로 멀리하고, 저런 이유로 무시하고...

 

강론을 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강의를 하든지 간에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표현은 정말로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위험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특정 전염병 환자들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와 '그들'을 구분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병을 앓았던(또는 앓고 있는) 사람이

다른 신자들과 똑같이 세례를 받고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자리에 앉아서 그 강론이나 설교를 듣고 있다면?

'그들'이라는 표현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을

'우리'가 아닌 '그들'로 밀어내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그런 일이 자주 생깁니다.)

 

(교회에서 만든 신문이나 서적의 묵상글들에서 그런 표현을 자주 보는데,

'그들을 제외한 우리'만 읽는 것으로 착각해서 그런 글을 쓰는 것일까?

왜 '우리만의 울타리'를 쳐놓고 형제를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가?

모든 사람이 다 '우리' 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런 일은 많은 경우에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라

평소에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대단히 비가톨릭적입니다.

신앙인은 항상 모든 사람이 다 '우리' 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한 분이시고, '우리'는 그냥 모든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을 위한 나라이고,

그 나라의 건설과 완성을 위해서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그들'이라고 구분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도 '그들'이 따로 있으면 안 됩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은 가족이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켜야 하는 '본분'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처럼

우리가 집에 있어도, 집을 나가도, 집에 돌아와도

우리는 아버지께서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그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