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농부인 쟝 드 폴과 베르트랑드 드 모라스의 6남매 중 셋째 아들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us)는 프랑스의 프루이(Prouy)에서 태어나 닥스(Dax) 대학교와 툴루즈(Toulouse)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160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605년 그는 어떤 부인의 기부금을 받기 위해 마르세유(Marseilles)에 갔다 돌아오던 중에 해적들에게 잡혀 튀니지에서 노예로 팔려가는 불운을 겪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1607년 아비뇽(Avignon)으로 탈출하였고, 그 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로마(Roma)로 갔으나 1609년에 앙리 4세에 대한 비밀 임무를 띠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때 그는 파리(Paris)에서 발로아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전담사제가 되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업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618년 그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을 파리에서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1625년 그는 선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회는 '빈첸시오회와 라자로회'로 알려졌고, 주로 농부들에게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하여 본당 단위의 회를 구성하였으며, 1633년에는 루이즈 드 마리약(Louise de Marillac, 3월 15일)과 더불어 '애덕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병원과 고아원을 세웠으며,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대속하였고 새로운 신학교를 세움으로써 사제 양성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해외 선교사 파견을 물론 프롱드 전쟁의 희생자 구호소를 세웠고 또 영적인 저술을 남겼다.
귀족적이고도 충성스러운 성격을 지녔던 그는 인간의 고통과 비참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일생을 다 바친 것이며, 그러한 인간악을 유발하는 환경을 제거하는데 적극성을 내보인 탁월한 인본주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1737년 6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하여 시성되었으며, 1885년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모든 자선단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강론 : (루카 9,43ㄴ-45)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43ㄴ-45)."
예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알아듣지 못하거나(루카 9,45; 18,34),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리거나(마태 16,22; 마르 8,32),
슬퍼하거나(마태 17,23), 두려워합니다(마르 9,32; 루카 9,45).
제자들은 부활에 관한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과 죽음에 관한 말씀만 듣고서 무서워했고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9월 27일의 복음 말씀에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라는 말은
당시의 제자들의 심정을 잘 나타냅니다.
이 말은 무서워서 못 물어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듣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어서 물어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라면
좀 더 쉽게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면 되는데,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말씀이었기 때문에 아예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신비'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믿지만 예수님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걸림돌'이고,
하느님도 예수님도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 1,23).
그러나 하느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이것은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믿음'과 '체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깨달음'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도들이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믿었고,
부활을 믿었고, 그때 비로소 십자가의 신비를 깨달았고 증언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그냥 어리석은 일로 끝났을 것이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남았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도들이 복음서를 기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에 관한 일들은
당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잠시 남아 있다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아무것도 아닌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설명하려면 먼저 부활을 말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부활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분'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십자가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정복한 일,
생명으로 이어지는 통로" 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은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기록한 단순한 역사책이 아닙니다.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일을 회상하면서,
그분에 대한 믿음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책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에도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9월 27일의 복음 말씀의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다음에
생략된 말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생략된 말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2)."
이 말은 성전 정화 장면에서 나오는 말인데,
사실 성전 정화 사건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제자들이 제대로 깨닫고 믿게 된 것은 부활 후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누구든지 한 번쯤은
"왜 꼭 그런 방식이어야 하는가? 다른 방식은 없는가?" 라고 묻게 됩니다.
다른 방식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고 믿을 뿐입니다.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 가운데에는
기꺼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도 있고, 물리쳐야 할 악도 있고,
감수해야 할 보속도 있습니다.
참고 견딤으로써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된다면
그 고난과 시련은 십자가이고,
반대로 물리침으로써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악입니다.
(악의 경우에 그것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 십자가가 됩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겪는 일이라면 그것은 보속입니다.
십자가라면 언젠가는 부활과 생명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희망하면서 인내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강 론 말 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4년 9월 29일 가해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0) | 2014.09.29 |
|---|---|
| 2014년 9월 28일 가해 연중 제26주일 (0) | 2014.09.28 |
| -지금여기 강론대- [서공석 신부] 바람 잡듯 헛된 일 (0) | 2014.09.26 |
| 2014년 9월 26일 가해 연중 제25주간 금요일(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순교자) (0) | 2014.09.26 |
| -지금여기 강론대- [최성영 신부] 생각을 바꾸어 (0) | 2014.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