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11월 17일 가해 연중 제33주간 월요일(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dariaofs 2014. 11. 17. 01:00

 

헝가리의 프레스부르크(Pressburg)에서 국왕 앤드레 2세(Endre II)와 왕비 제르트루다(Gertruda)의 딸로 태어난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14세 되던 해에 튀링겐(Thuringen) 영주 헤르만 1세(Hermann I)의 둘째 아들인 루트비히 4세와 결혼하였다.

 

비록 이 결혼이 정치적 이유로 이루어졌지만 화목하고 평화스러웠다고 하며 6년 동안을 서로 만족스럽게 살았다. 그들의 집은 아이제나흐(Eisenach) 근교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있었고 자녀는 세 명을 두었다.

그러나 1227년에 루트비히 4세가 풀리아(Puglia)로 출정하는 십자군에 가담하였다가 9월 11일 이탈리아 남동부 오트란토(Otranto)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그녀는 온갖 슬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다가 자선활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집안의 많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그녀는 자녀들을 위하여 대비책을 마련한 뒤에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어 세속을 떠났다. 이때부터 그녀는 헤센(Hessen)의 마르부르크(Marburg) 성에 살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다.

성녀 엘리사벳은 마르부르크의 콘라트(Conrad)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았는데, 그녀의 영적 생활은 날이 갈수록 풍요롭게 변화되었다. 누구나 놀랄 정도로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으며 깊은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감쌌던 것이다.

 

그녀는 운명하기 4년 전에 자신을 쫓아냈던 시동생으로부터 마르부르크 성으로 돌아올 허가를 받았고 또 그녀의 아들에게 백작을 승계시킬 수 있었다.

여왕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직접 음식을 날라주고 옷을 지어 준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녀는 독일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녀가 되었다. 그녀는 불과 24년밖에 살지 못하고 마르부르크에서 운명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작은 형제회 재속 3회의 수호성인으로 높은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녀는 1235년 5월 28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이탈리아 페루자(Perugia)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14세기 이후 엘리사벳의 성화는 망토에 장미꽃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려고 몰래 빵을 감추고 나가다가 남편에게 들키자 그 빵이 장미꽃으로 변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빵 제조업자와 빵 집의 수호성인이다.

 

강론   :   (루카 18,35-43)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예리코 근처에서 예수님과 어떤 눈먼 이가 만납니다.

그 눈먼 이는 예수님께 자기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게 된 그는 예수님을 따릅니다(루카 18,35-43).

 

예리코의 눈먼 이는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걸을 하는 사람이 청하는 '자비'는 보통 몇 푼의 돈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리코의 눈먼 이가 예수님께 청한 '자비'는

몇 푼의 돈이 아니라 '다시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를 원했습니다.

 

예리코의 눈먼 이는 예수님을 만난 적은 없지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께서, 또는 메시아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청했습니다.

몇 푼의 돈은 누구나 줄 수 있는 것이지만,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꿔 주실 수 있는 분은 메시아뿐입니다.

 

지금 이 내용을 반대로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의 인생을 바꿔 주시려고 해도

그 자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가르침이 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다시 보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셔도

눈먼 이 쪽에서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몇 푼의 돈이나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진짜로 중요하고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시는데 아무것도 아닌 것만 청하고,

그것만 받고 만족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도 무엇을 희망하고 청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을 청하지 않고

눈앞의 작은 이익이나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리코의 눈먼 이가 다시 보게 된 후의 모습도 중요한 가르침이 됩니다.

그는 보게 되자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복음서 안에서 이 일은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길이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향해서 가시는 길입니다.

예리코의 눈먼 이는 바로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복음서에는 예리코의 눈먼 이에 대한 언급이 더 이상 안 나오지만,

아마도 그는 계속 충실하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예수님께 청하고 그것을 얻었을 때,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가? 는 우리의 숙제입니다.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예수님을 떠날 것인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한 번 주신 것을 취소하시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더 큰 것은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이야기는

어떤 마을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병을 고친

열 명의 환자들의 이야기와 비교됩니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아홉 명은 병을 고친 다음에 예수님을 떠나버렸지만,

한 명은 되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라는 말씀과

예리코의 눈먼 이에게 하신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라는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라는 말씀은

구원의 길을 향해서 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다시 보아라." 라는 말씀은 구원의 길이 어떤 길인지 잘 보고

그 길로 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병을 고치고, 시각 장애를 고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해야 합니다.

몇 푼의 돈을 더 버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보물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루카 12,33).

 

'예리코의 눈먼 이'의 이야기와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되어 있는 장애자의 이야기의 상황이 비슷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가다가 구걸을 하는 어떤 장애자를 만납니다.

그 장애자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자선'을 청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에게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라고 말하면서 그를 잡아 일으킵니다.

그 장애자는 즉시 건강해져서 벌떡 일어나 걷게 됩니다(사도 3,1-10).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사람은 사도들을 몰랐고,

예수님도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몰랐기 때문에 자기 인생의 변화를 청하지 않았지만,

그런 희망이나 의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는 말이 있는데(사도 3,4),

이 말은 그 장애자가 정말로 희망하는 것이 몇 푼의 돈인지,

아니면 인생의 근본적인 변화인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 장애자가 그저 몇 푼의 돈만 바라는 사람이었다면,

베드로 사도가 기적을 일으키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