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루치아(Lucia)는 시칠리아(Sicilia)의 시라쿠사(Siracusa)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양친은 귀족이었으며 매우 부유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신앙을 배워 익히며 자랐지만 불행히도 아기 때에 부친을 잃었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그녀는 스스로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했는데, 이 사실을 비밀로 간직하던 그녀는 어머니의 결혼 강요를 늘 받았다.
딸의 설득에 감복한 그녀의 어머니 에우티키아(Eutychia)는 카타니아(Catania)로 가서, 자신이 고생하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성녀 아가타(Agatha)의 무덤에서 기도하였다. 이때 루치아도 따라갔는데,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이 있었다.
한편 그녀의 청혼자는 이를 매우 분개하여 그녀를 집정관에게 고발하였다. 이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으므로 즉각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재판관은 그녀에게 매음굴로 보내는 판결을 내렸으나, 하느님의 권능에 힘입어 그녀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녀를 요지부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태워 죽이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입속으로 칼을 넣어 죽였다고 한다. 그녀는 가장 빛나는 동정 순교자로 공경을 받으며, 중세 시대부터 눈병을 앓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준다는 설이 있다.
강론 : (마태 17,10-13)
<메시아이신 예수님>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7,11-13)."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것을 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었지만,
율법학자들의 주장이 마음에 걸려서 그것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근거로 해서,
메시아가 오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와야 하는데
'아직' 엘리야가 안 왔기 때문에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 23)."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다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내용은 마태오복음 11장의 내용과 연결됩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2-15)."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말도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믿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있는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였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입니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직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를 믿을 것인가?"가 중요하겠지만,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믿을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믿음'은 한 번 믿는 것으로 끝나는 일회성 행위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 완성될 때까지 날마다 꾸준히 계속해야 하는 '삶'입니다.
1) 믿음은 '살아 있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반대로 말하면, '믿지 않음'은 '죽어 있음'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요한 15,6)."
그런데 '살아 있음'은 살아 있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상태입니다.
살아 있기 위한 노력이 멈추어진 상태는 죽은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숨쉬기를 멈춘 상태는 죽은 상태입니다.)
살아 있기 위해서 날마다 끊임없이 숨을 쉬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 속에서 살기 위해서
'믿으려는 노력'을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2) 믿음은 '사랑하기'입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장).
그런데 사랑도 역시 사랑한다고 한 번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회성 행위가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계속 노력해야 하는 '삶'입니다.
그 노력을 멈추면 사랑이 식어버립니다.
차갑게 식어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식으면 믿음도 식게 됩니다.
지금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나 '세속에 대한 사랑'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15)."
3) 믿음은 '희망하기'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희망하고, 희망하기 때문에 믿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만일에 어떤 시련과 고난 때문에 희망을 잃고 절망 상태에 빠진다면,
그것은 사실상 믿음을 잃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버리면 안 되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5)."
그런데 희망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1티모 6,17)."
지금까지 한 말을 요약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그것을 믿는다면 날마다 끊임없이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예수님에게만 희망을 두어야 한다."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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