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12월 27일 나해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dariaofs 2014. 12. 27. 01:30

 

 

성 요한(Joannes)은 갈릴래아의 어부로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야고보(Jacobus, 7월 25일)의 동생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겐네사렛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삯군들과 배를 남겨둔 채 예수를 따라 나섰다(마태 4,21-22; 마르 1,19-20; 루가 5,10-11).

 

이들 형제는 성격이 매우 급하고 또 흥분을 잘 하였기 때문에(마르 10,35-41), 예수님은 그들을 '천둥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마르 3,17).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중요한 행적, 예를 들어 예수님이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렸을 때(마르 5,37; 루가 8,51),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마태 17,1; 마르 9,2; 루가 9,28), 게세마니(Gethsemane) 동산의 기도(마태 26,37; 마르 14,33)와 같은 극히 중요한 시기에 베드로(Petrus)와 함께 예수님 곁에 있었다.

 

또 성서 여기저기에는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라는 인상을 주며, 최후의 만찬 때에 스승의 가슴에 기댔던 사람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셨다(요한 19,25-27). 뿐만 아니라 부활 아침에는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달려갔고(요한 20,1-5), 그분의 부활을 믿었으며,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요한 21,7).

사도행전에서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활동하며 투옥당하기도 했다. 성 바오로(Paulus)는 야고보와 게파(베드로)와 함께 요한을 일컬어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다(갈라 2,9). 후일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진리를 증언한 탓으로 파트모스(Patmos) 섬에서 유배생활을 했고(묵시 1,9), 에페수스(Ephesus)에서 여생을 지내다가 그곳에서 수를 다하고 선종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에 따르면 성 요한은 너무나 연세가 높아서 군중들에게 설교할 수 없었고, 다만 간단한 말만 하였다고 한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네 번째 복음서와 서간 3개 그리고 묵시록은 성 요한의 저작물이라고 전해져온다. 사도 요한의 문장은 독수리이다. 그 이유는 요한 복음서의 서두가 매우 높은 위치에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강론   :     (요한 20,2-8)

 

<믿는다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본 마리아 막달레나가 사도들에게 달려가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자(요한 20,1-2)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합니다(요한 20,3-7).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조심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보고'는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입니다.

'믿었다.'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뒤의 9절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제자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아직'을 "빈 무덤을 본 뒤에도"로 해석한다면,

8절의 '믿었다.' 라는 말은

마리아의 막달레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뜻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아직'이라는 말을 "빈 무덤을 보기 전까지는"으로 해석한다면,

빈 무덤을 보고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실 때 부활도 예고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요한이 빈 무덤을 보고 믿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 예고 말씀을 믿었다는 뜻이고,

또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믿음은 아직은 부족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에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빈 무덤을 함께 본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증언한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인데,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 부활을 증언했습니다(요한 20,18).

 

사도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뒤에 그때서야 비로소 확실하게 믿게 되었고,

그때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토마스 사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에게도 하신 말씀이 됩니다.

또 오늘날의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예수님의 탄생 때의 상황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루카 2,8-14),

만일에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다면 무시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의심하거나 반신반의 하면서

"그래도 혹시" 라는 심정으로 직접 가서 확인해 보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기록된 목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천사의 말을 믿었고, 믿었기 때문에 구세주를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루카 2,15)."

목자들은 보기 전에 말씀만 듣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믿었기 때문에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목자들은 가까운 곳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먼 곳에서 온 동방박사들의 경우에는 진짜로 큰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서 오긴 했지만, 구세주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도 몰랐고, 글자 그대로 '그냥' 왔습니다.

그들도 역시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게 된 사도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부활 전에는 겁 많고 의심 많고 나약했던 사람들이

부활 후에는 믿음, 기쁨, 열정, 용기로 가득 찬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사도 4,13)."

 

말로 하는 증언과 복음 선포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때도 많고(사도 6,9),

비웃음을 사거나 무시당할 때도 많습니다(사도 17,32).

그러나 믿음으로 변화된 모습은, 즉 '삶'으로 하는 증언은 논쟁의 여지도 없고,

무시당하기는커녕 사람들을 감화시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2-14)."

 

대림시기와 성탄절을 지낸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

그저 "큰 행사를 치렀으니 이제 좀 쉬자." 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해마다 반복되는 축일이라서

늘 하던 대로 습관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지낸 것은 아닌가?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하면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공허한 교리나

신학 이론만 말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 교회는, 또는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자신은

믿음과 희망을 잃어버린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 희망, 기쁨을 얼마나 주고 있는가?

 

지금 교회는(나는) 정말로 이 세상에 빛과 생명을 전해 주고 있는가?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