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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1. 하느님이 '사람'이 된 까닭은?

dariaofs 2015. 1. 6. 02:30

“같은 사람이고 싶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미생>에 나온 대사다. 드라마 속의 비정규직 노동자 장그래. 그의 소원은 선배들, 동료들과 함께 그냥 사람처럼 일을 하고 싶은거다.

 

그러나 고졸 검정고시 출신에 변변한 “스펙”도, 유창한 외국어 실력도 없는 그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같은” 사람이라니.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한다. 분수를 알고 “가만히 있으라”한다.

 

브라운관 밖의 세상은 더 가혹하다. 세상에 “같은” 사람들은 없다. 성(性)과 지위와 학력과 출신과 배경에 따라 살아갈 인생들이 미적분된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유일한 고리는 먹이 사슬이다.

 

 강한 자는 약한 자에게 폭언과 폭력을 퍼붓고, 일자리를 빼앗고, 성추행을 일삼아도 용납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약육강식. 짐승들의 세상, 아니 그보다도 난폭하고 끔찍하다. 짐승은 쾌락을 목적으로 다른 생명을 해하지 않는다.

 

이 폭력의 세상으로, 올해도 예수가 온다. 한없는 생명을 버리고, 한줌의 목숨을 얻어, 한톨의 인정조차 찾기 힘든 세상 속으로, 그가 온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연약한 아기의 몸으로, 채 말도 되지 않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가 온다. “같은 사람이고” 싶어서.

 

   
 

지혜로운 시므온 영감의 탄식이 이천년을 거슬러 올해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는 많은 이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될 것이다.

 

그를 지켜볼 착한 어미의 마음은 언제나처럼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다(루카 2:25-34). 그러나 그는 마침내 이 폭력의 세상, 민낯을 드러낼 것이다.

 

폭력의 세상에서 사회교리를 지침으로 삼아 살아 간다는 것은, 예수처럼 연약한 살갗 드러내고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세상을 거슬러 살 운명을 타고 난 아기, 그와 함께 살고, 죽고, 다시 살 것을 믿으며 12월 칼바람에 거리로 나서는 것이다.

 

태어난 아기는 아직 목을 가눌 줄도 모르는데, 세상은 그를 맞는다며 떠들썩한 카니발을 벌이고 있다.

 

네온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축제의 제단 아래 욕망의 제물로 바쳐지고 있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사회교리는 그들 안에서 무방비 상태의 아기 예수를 본다.

 

사람은 폭력의 세상에 적응할 수 없다. 사람은 약한 것들에게 연민을 느끼도록 창조되었다. 약한 것들이 스러져 가는 것을 보다 보다 애끓는 연민을 견딜 수 없어 사람이 된 것이 하느님의 마음이다.

 

사람 안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란 그런 것이다. 하느님을 닮아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러므로 여린 마음 서로 기대야만 살아갈 수 있다. 남을 이기고 밟고 혼자 서서 내달리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아니다.

 

사람은 마음과 마음을 나눌 때, 체온과 체온을 나눌 때, 어깨와 어깨를 기댈 때에만 사람다워진다. 사람은, 사람을 거울 삼아 자신의 모습에 새겨져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발견한다. 그렇게 사회교리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을 본다.

 

사회교리를 마치 본교과 과정에 딸린 봉사활동인 것처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가톨릭 신앙의 본질이라면, 사회교리는 가톨릭 신앙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를 닮아 산다는 것이다. 그가 사람의 몸으로 하느님을 드러내고 사람을 살렸듯이, 사회교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을 드러내고 세상을 살리라고 권고한다.

 

그러므로 사회교리는 강생(降生)의 성사다. 예수가 그랬듯,“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 성사다.

 

세상의 모든 연약한 목숨들 - “장그래”들, 경비 노동자들, 해고 노동자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그리고 또 이름 조차 내놓지 못하는 소외되고 버림 받은 모든 이들과 더불어 “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 성사다.

 

 

조민아 교수/평신도 신학자, 미국 세인트 캐서린 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