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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주일 복음 묵상]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 세계 평화의 날

dariaofs 2015. 1. 5. 18:10

   
 

하느님의 말씀 듣기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 루카 2,16-21

 

예전에 저희 수도원에는 사람 크기 만한 개 '순복이'가 있었습니다.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 “순복아~” 하고 부르면 “네~”라고 답하듯 컹컹 짖고 꼬리를 흔들며 저희를 기쁘게 맞이해 주었던 녀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순복이는 단 한 번도 저희들에게 “다녀오셨어요?”라고 인사를 하지도 않았고 “네~” 라고 말한 적도 없었습니다.

 

순복이는 단순히 짖고 꼬리만 흔들었을 뿐이었는데, 그것을 바라본 저희가 반갑다고 알아들은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천사는 누구의 말을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순복이가 그랬듯이 천사도 천사의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순복이의 말을 알아들었듯이 늘 기도 안에서 살았던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알아들은 것입니다.

 

하느님도 우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누구의 말과 누구의 행동으로 하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내 안의 헤로데

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 2,1-12

 

예전에 아버지와 한강을 마주 보며 식사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한강을 지그시 바라보시며 "아들 내가 여기서 수영을 하며 놀았어. 시간이 지나니까 통통배가 생기더라고. 그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땐 참 가난했었지." 아버지께서 '가난'이라는 말을 흘리시며 말을 마치셨을 때 마음으로 그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회상하며 오늘의 가난의 의미를 살펴보게 됩니다. 부족함의 가난이 아닌 전체에서 일부의 모자람을 가난이라고 말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헤로데는 무엇이 두려워 아기 예수의 행방을 물어 보았을까요? 모든 것을 다 가진 이가 일부를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일까요? 우리 마음 속의 헤로데를 살펴보는 오늘입니다.

 

우리 형

1월 11일, 주님 세례 축일 : 마르 1,7-11

 

수도원에 들어와 살면서 많은 형과 동생들이 생겨났습니다. 한 해 한 해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가는데 어느 날 중요한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저는 두 살 터울인 친형과 살았기 때문에 제게 있어 '형'의 정의는 언제나 '우리 형'이었습니다.

 

수도원의 형들과 아무리 친해져도 그 형들은 우리 형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우리 형 같지 않은 이상함은 계속되었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친한 형님 수사님을 찾아가 솔직하게 물었습니다. “형! 나는 형이 친형 같지 않다.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이렇게 친형 같지 않지?” 형님 수사님은 제게 말했습니다.

 

 “형제~ 우리는 말이야 보다 다른 형제애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수도회 형은 수도회 형이지 너의 친형이 될 수는 없잖아.” 보다 다른 형제애라는 말에 ‘우리 형’이라는 정의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고집스럽게 가지고 있었던 저의 정의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내 시선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선이 자리 잡는 것, 즉 내 시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세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세례를 통해 시선이 변화되면 “가톨릭 신자가 왜 이래?”와 같은 불만 섞인 말들이 점점 사라지지 않을까요?

 

와서 보라

1월 18일, 연중 제2주일 (일치 주간) : 요한 1,35-42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뒤따라 갑니다. 인기척을 느낀 예수님은 돌아보시며 그들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이에 요한의 제자들은 답합니다. “선생님 어디에 머무십니까?”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님이 가 보라고 해서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들입니다. 지금 자신이 따라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따라가는지 잘 모릅니다. 단순히 스승 요한이 따라가라고 하니 따라가고 있는 겁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는데 오히려 그분이 묻습니다. ‘무엇을 원하는데 나를 따라오느냐’고 말입니다. 그분이 주님인 줄 알았다면 원하는 것을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 예수에게는 뭐 딱히 기대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답은 하나! 우리를 보내신 스승님의 의중을 파악하고 물어 보자! “선생님 어디에 머무십니까?”

 

어디에 머무시는지 알려만 주시면 우리의 스승님께 가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디에 머무는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겠다.”

 

“와서 보라!”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지내다가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본 스승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보았소.”


신앙은 잘 모르기 때문에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 배워 익힌 대로 실천합니다. 배운 대로 실천하다 어느 날 신앙의 질문을 만나게 되고, 질문에 스스로 답하면서 신앙은 성숙합니다.

 

답이 좀 틀리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답하다가 “와서 보라”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내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면 그게 더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물을 버리고

1월 25일, 연중 제3주일 (해외 원조 주일) : 마르 1,14-20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립니다. 그럼 어부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까요? 오늘날의 시선으로 이 사건을 볼 때 예수님을 따르고자 그물을 던진 제자들의 행동은 이해받을 수 있을까요?


신자유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영리의 재분배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조직 구조를 영리 위주의 종속 관계로 재배치하는 무시무시한 이론입니다.

 

영리를 위해서라면 가족의 역할이 붕괴되어도, 산림이 파괴되어도, 인간의 존엄이 무시되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신자유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부의 축척에 있지 않고,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여 모두가 공평하게 행복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마주 대하고 있는 우리들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적극적인 나눔입니다. 가끔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들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은 안 힘드세요?” 제가 답합니다. “응, 나도 힘들고 아파. 그래도 들어 주는 거야.”


많이 가지고 넉넉해야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재물을 나누는 것만이 나눔은 아닙니다.

 

 마음을 나누고, 재물도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일을 시작한 이들과도 함께 살고,

 

하느님께서 손수 빚으신 사람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며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누는 오늘의 시작! 오늘은 원조 주일입니다.


이영준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한국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