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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dariaofs 2014. 12. 26. 04:30

<뜻밖의 소식>을 만들게 되면서, 우리신학연구소에 작은 방을 하나 빌려 편집실로 쓰고 있습니다.

 

1933년 도로시 데이가 처음 신문을 만들 때는 허름한 자기 집 부엌에 타자기 한 대를 들여놓고 시작했지요. 그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뜻일까요?

 

창밖에는 어느 젊은 남정네가 붕어빵을 만들어 팔고 있는데, 어스름이 깃드는 저녁이면 어김없이 부인이 찾아옵니다.

 

정장 차림을 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퇴근길인 모양인데, 잠시 후면 이 부부는 손바닥만 한 천막을 싸매고 ‘다복한’ 제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아직 아기는 없는 모양인데, 조만간 귀한 아기를 축복처럼 선물 받겠지, 생각합니다.

 

나는 십수 년 전 전라도 무주에 귀농한 다음 해에 귀한 딸을 맞이했습니다. 무남독녀 외딸. 그날은 눈이 폭신하게 내려 산골이 하얗게 빛나고, 그 아이는 감자밭을 뒹굴며 자랐습니다.

 

아이의 세례명은 ‘미셸’입니다. 지금은 다들 ‘미카엘라’라고 부르는데, 미카엘 천사와 그의 동료 천사들이 늘 아이를 기쁨 안에서 살도록 배려해주시길 빌었죠.

 

시골집 툇마루 기둥에 세 천사들에게 바치는 찬미가를 붙여놓고, 업어서 잠재우는 동안 마루를 오가며 이 기도를 읊조렸습니다.

 

“평화의 사자이신 성미카엘을
 주께서 우리집에 보내주시면
 친밀히 우리집에 오실때마다
 우리의 마음행복 커져가리다.
 하늘의 용사이신 가브리엘이여.
 오시어 옛원수를 몰아내시고
 우리집 자주찾아 방문하시며
 우리를 인자로이 도와주소서.
 하늘의 의사이신 라파엘천사.
 하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어
 갖가지 질병일랑 고쳐주시고
 우리의 생활지도 맡아주소서.”

 

   
 ⓒ 김용길

 

아기들은 모두 부모가 지상으로 초대한 ‘손님’들입니다. 이미 오신 손님이니 함께 지내는 동안 정성껏 대접하고, 나중엔 여비를 보태 떠나보내야 할 손님입니다.

 

그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사실상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이지요.

 

그분께서 은총처럼 허락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우리의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과 우리 모두가 ‘평등한’ 그분의 호흡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언젠가 ‘노숙인 다시서기 센터’에서 일하시던 성공회 신부님께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어느 노숙하시던 여인이 공중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답니다.

 

그 아기를 보면서, 이 신부님은 과연 이 아기의 탄생도 여느 집 아기처럼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야 할까, 갈등이 생겼답니다. 그 신부님은 아직도 그 답을 얻지 못했다고 하는데, 난감합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권력을 누리던 헤로데가 자기 왕궁에 조용히 잠입한 ‘위험한 아기’를 찾아내기 위해 어린 아기들을 무참하게 죽이는 상황에서 태어난 분이 아기 예수님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부모와 함께 이방의 땅, 에집트로 피신을 가야 했습니다. 그 부모들은 이주노동자로 거기서 살았겠지요.

 

다른 복음서에서는 제국이 강요한 호구조사령으로 예수님의 부모가 고향 베들레헴에 찾아갔지만, 친척들마저 하나 없는 땅에서 여인숙을 찾아 쉬려해도 그곳은 요셉처럼 고향에서 밀려난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결국 아기 예수님은 짐승들이 머무는 마굿간에서 태어났지요.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정치권력에 의해 핍박을 받았던 사람이었고, 그분은 ‘가난한 자리’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복음서의 처음과 끝에는 늘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씀하신 모양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 밖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볼 도리가 없는 모양입니다. ‘가난한’ 주님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한상봉/뜻밖의 소식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