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9,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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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심,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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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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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은,
그 사람의 숨을 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이미 숨지신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때 생긴 옆구리의 상처는 손과 발의 상처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이 틀림없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시가 됩니다(요한 20,20).
(그래서 그 상처들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돌아가셨다는 것과
바로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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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숨지셨음을 나타내는데,
이것을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1.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생긴 것처럼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생겼음을 상징한다는 것.
(예수님에게서 교회가 생겼다는 것, 즉 교회의 기원은 예수님이라는 것.)
2. 피는 성체성사를, 물은 세례성사를 상징한다는 것.
3. 피는 예수님의 희생을, 물은 구원을 상징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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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경 본문에는 '옆구리'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심장 가까운 곳의 옆구리,
사실상 심장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면,
피는 예수님의 사랑을, 물은 인류 구원을 상징하고,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인류를 구원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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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심 대축일'이라는 용어에서 '성심'은 예수님의 심장을 뜻하는데,
심장은 '마음'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마음은 곧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경축하는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사랑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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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복음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론'일 뿐입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삶'입니다.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도들과 신자들은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하는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머리로만 생각하고 마음으로는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실제 '삶'에서 그 사랑이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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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예수님 승천 후에도
바오로 사도처럼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사랑을 받은 사람도 있고,
직접적인 어떤 체험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드물고,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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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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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모두 하나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변화되어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도 있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든 그 사랑은 모두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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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말은, "사랑하여라."입니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
그 사랑을 통해서 이웃의 사랑과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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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먼저' 주면, '나중에'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줌으로써 자기가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깨닫게 해 줍니다.
자기가 사랑 받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지금 주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이미' 받았고, 늘 받고 있고, 그 사랑 속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시고
그 다음에 사랑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언제나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때가 많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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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는 사랑을 받는 사람 쪽에서도
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 사랑과 예수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하느님 사랑과 예수님 사랑은 이웃을 통해서 옵니다.
(물론 직접 받는 경우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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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을 받은 적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보면,
한 번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불행한 인생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받은 적 없다고 생각해서 주지도 않은 것이고,
동시에 준 적이 없어서 받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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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에, 간절하게 기도했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거나,
원하는 것과는 반대의 결과가 생겼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 아닌가?" 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달라는 대로 아무거나 다 주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마태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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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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