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41-51)
<사랑, 기쁨>
'성모 성심'은 '성모님의 사랑'을 뜻하는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
예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모두 가리킵니다.
1) 성모님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실제로는 종이 아닌데도 종처럼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자신도 원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요구 조건도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할 뿐입니다.
성모님의 사랑과 정반대쪽에 이기적인 기복신앙이 있습니다.
현세적인 복을 빌기만 하는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은데,
기복신앙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어떤 복을 받기를 바라기 때문에 섬깁니다.
청하는 것은 많은데 감사드리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뜻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이웃에 대한 관심도, 사랑도 없습니다.
2) 성모님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크면 고통도 비례해서 커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함께 가신(요한 19,25) 성모님의 고통은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통보다 더 컸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짐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어머니의 고통은 직접 겪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정말로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는
예수님 말씀을 모범적으로 실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따라야 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고,
"나를 따르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당연히 따르게 되고, 함께 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말로만' 하지 말고,
성모님을 본받아서 '삶으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성모님 외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론 예수님을 사랑해서 따라간 사람들이지만,
성모님을 사랑해서, 또 성모님을 본받고 따르기 위해서,
성모님과 함께 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3) 성모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우리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 13,3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실 때 하신 말씀인데,
'어머니의 사랑'을 잘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성모님의 사랑은 하나입니다.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랑.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잃었다가 찾았을 때 하신 말씀이지만,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대로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구원을 받는 일보다는 속세의 인생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착하면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성모님의 마음(사랑)은 '애타는 마음', 또는 '안타까움'입니다.
살 길을 외면하고 죽을 길로만 가는 자녀들을 보면서
어머니로서 애가 타는 마음이(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바로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때서야 자신의 불효를 후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후회'는 너무 늦은 뉘우침입니다.
효도를 하려고 해도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성모님에 대한 효도는, 즉 신앙생활을 제대로 충실하게 하는 것은
죽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 하면 됩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후회'는 지옥에 간 사람들이나 하는 일입니다(루카 13,28).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는데(마태 27,3),
그 다음에 자살했기 때문에 그의 '뉘우침'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살하기 전부터 이미
지옥에 가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상태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후회만 하고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은,
또는 회개하기를 거부한 뒤에 후회만 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안타까움(애타는 마음)'의 반대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셨을 때,
그 제자들은 일을 마친 뒤에 기뻐하면서 돌아왔고(루카 10,17),
그들을 보신 예수님께서도 기뻐하셨습니다(루카 10,21).
바로 그런 '기쁨'입니다.
신앙인의 기쁨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기쁨이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기쁨은 신앙인의 기쁨입니다(요한 3,29).
"지금 나의 '삶'은 예수님과 성모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인가?"
"예수님과 성모님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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