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성 토마스는 아마도 갈릴래아 출신인 듯하며 쌍둥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성 토마스는 12사도 중의 한 명이지만 언제 그리고 어디서 사도로 뽑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그는 라자루스(Lazarus)가 죽음에서 부활할 때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요한 11,16),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께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여쭈어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해답을 들었다(요한 14,5-6).
또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발현하셨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0,24-27).
이 때 그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최초로 인정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되었다. 또 예수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발현하셨을 때에도 그 현장에 있었다(요한 21,1 이하).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성 토마스는 나중에 파르티아(Parthia, 고대 이란의 왕국)에서 설교하였고, 또 다른 옛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순교하여 마드라스(Madras) 교외 밀라포르(Mylapore)에 묻혔다고 한다. 성 토마스는 건축가의 수호성인이고, 1972년에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인도의 사도로 선언되었다.
강론 : (요한 20,24-29)
<토마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부른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한) 첫 번째 제자이고,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신학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신 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고백한 제자라는 점에서(마태 16,16)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라는 고백과
'하느님'이라는 고백은 뜻도 다르고 차원도 다릅니다.
그러나 두 사도의 믿음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두 사도의 고백은 모두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에 더 초점을 맞춘 고백이고,
토마스 사도의 고백은 예수님의 본성과 본질에 더 초점을 맞춘 고백입니다.
두 사도의 고백을 합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며,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신 그리스도이신 분이다."가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한 분뿐이라는 믿음과 이 고백이 충돌한다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두 사도가 하느님은 두 분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유대인으로서
하느님은 야훼 하느님 한 분뿐이라는 유대교 신앙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인간 예수의 모습으로 오신 것으로 생각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했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아버지 하느님과 아드님이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으로
구분되어 계시되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생겼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계시된 교리입니다.
물론 '삼위일체' 라는 용어는 학자들이 만들었지만.)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한 것은 사도단을 대표해서 고백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토마스 사도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토마스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처음의 고백을 더욱 강하고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고,
처음의 고백 속에 숨어 있었던 뜻을 겉으로 완전히 드러낸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다른 사도들의 말을 안 믿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많은데,
그의 신앙 고백을 바탕으로 그 일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다른 사도들의 증언을 안 믿은 것이지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아닙니다.)
토마스 사도가 의심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부활하신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같은 분인가? 라는 의심.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토마스 사도의 말은(요한 20,25),
사도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바로 그분인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사도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이 그동안 함께 지낸 그분이 아니라
하늘에서 새로 오신 영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부활 자체를 의심한 것은 아닌 것이 되고, 부활을 다르게 이해한 것이 됩니다.)
2) 다른 사도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만난 것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
(어떤 환시 같은 것을 체험했거나 유령을 본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
이것은 토마스 사도만의 의심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여자들이 증언했을 때
사도들은 그 말을 '헛소리' 라고('헛것'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루카 24,11).
또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을 때,
사도들은 자기들이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습니다(루카 24,37).
따라서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을', 즉 사도들의 증언을 의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자체가 흔들린 것이 아니라면,
"...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라는 토마스 사도의 말은 "절대로 믿지 않겠다."가 아니라,
"나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라는 강한 소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토마스 사도의 의심은 정당한 것이었고,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그 뒤에 복음을 선포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돌아가셨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썼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같은 분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은 환시도 아니고, 착각도 아니고,
분명히 실제 상황이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는
"동료의 말을 안 믿다가 나를 보고서야 그 말을 믿느냐?"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을 안 믿었다는 뜻이 아니라, 동료의 말을 안 믿었다는 뜻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나를 직접 보지 않았어도 사도들의 증언만 듣고 믿는 사람은 복되다."
라고 모든 사람에게(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은, 토마스 사도가 불행하다는 뜻도 아니고,
그가 우리보다 덜 행복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었던 토마스 사도는
오늘날의 우리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에서 "복되다." 라는 말은 "구원을 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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