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9월 16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 순교자 기념일)

dariaofs 2015. 9. 16. 06:29

 

성 고르넬리오 교황 순교자

로마(Roma)의 사제이던 성 코르넬리우스(또는 고르넬리오)는 성 파비아누스(Fabianus)의 순교 이후 거의 14년 동안이나 지연되어 오던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황 선출이 지연된 것은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문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이룬 주요 업적은 박해 동안에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과의 화해 정책이다. 그는 배교자들의 합당한 통회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한 반면, 배교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단죄하고, 교회가 그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일파를 공격하던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를 끝까지 옹호하였다.

 

 한편 그는 배교자를 용서하는 권한이 교회에는 없을 뿐더러, 이제 자신이 교황이라고 선언했던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와 그를 정점으로 모인 엄격파들을 단죄하여 교회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노바티아누스는 첫 번째 대립 교황이었다.

노바티아누스의 극단주의를 옹호하는 무리들은 재차 힘을 규합하였고, 동방에서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코르넬리우스는 교회가 통회하는 배교자들을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재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코르넬리우스의 제의로 251년 10월에 개최된 서방 주교들의 시노드(Synod)는 노바티아누스 일파의 가르침을 단죄하고, 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

황제 갈루스가 253년에 또 다시 그리스도교 박해를 재개하자, 그는 첸툼첼레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하였다.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200-21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유복한 이교 가정에서 내어난 성 타스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 또는 치프리아노)는 수사학자이자 법률가였고 또 교사였다. 그는 246년경 속세의 불의와 부패에 회의와 실망을 느끼던 중 하느님의 은총으로 노사제인 코일리키우스(Coelicius)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즉시 당대의 저명한 성서학자이자 유명한 저술가가 되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후 그는 사제품을 받았고, 249년 초에 카르타고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249년에 일어난 데키우스(Decius)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피신하였으나, 은밀히 피신처에서 편지 등을 보내는 방법으로 자기 교구를 계속 지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피신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251년에 교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많은 교구민들이 박해 동안에 배교하였고, 또 자신의 주교 선임을 반대하던 사제 노바티아누스(Novatianus)가 이단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노바티아누스 신부는 배교한 신자들에게 아무런 회개 행위도 요구하지 않고 교회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지나친 관대함을 나무라고, 박해 당시 배교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규율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죽을 위험에 처한 배교자를 제외하고는 새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배교자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유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251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된 성 코르넬리우스(Cornelius, 9월 16일)가 배교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 노바티아누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바꾸어 배교자들은 영원히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는 배타적인 엄격주의자로 돌변하였다. 로마(Roma)의 주교로 선출될 것을 기대했던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대립교황으로 등장하며 이교적인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즈음에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가톨릭 교회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와 "배교자들에 관하여"(De lapsis)를 저술, 배포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오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안에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하였다.

배교자 문제가 해결된 지 얼아 안 되는 252-254년 사이에 아프리카 지역에 몸서리치는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이를 물리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를 반대하는 이들과 신자들은 흑사병을 그리스도교와 성 키프리아누스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며 박해의 빌미로 삼았다.

 

즉 그리스도교 신자들 때문에 하늘이 분노하여 전염병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사람들의 낭설을 반박하고 위로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데메트리아누스에게"(Ad Demetrianum)과 "죽음에 대하여"(De mortalitate)라는 책을 썼다.

그 후 얼마 뒤에 그와 아프리카의 다른 주교들은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황은 이단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이 베푼 세례도 유효하다고 인정한 반면, 그들은 이를 극구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255년 성 키프리아누스는 지역 주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카르타고에서 주교회의를 열고 이단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성 키프리아누스는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당시 로마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또 모든 주교와 사제와 부제들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 예식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지방 총독인 파테르누스에 의하여 카르타고에서 50마일 거리에 있는 쿠루비스로 유배되었다.

 

 또 다음해에는 모든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새 총독인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소환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끝까지 이교의 신에게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여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는 교회, 사목, 성서, 성사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하여 박해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13편의 저서와 65편의 서간들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강론  :  루카 7,31-35    디모테오1서  :  3,14-16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오늘 디모테오서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생각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아시다시피 디모테오서는 사목 서간이고,

디모테오는 하느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목자였듯이

저도 하느님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목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본당 사목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가 하느님 교회 밖의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 안의 사람이고, 더욱이 사제요, 수도자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올바른 처신은 무엇보다도

이런 저의 정체성을 갖고서 처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은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그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을 무엇 때문에 하느냐는 뜻이지요.

 

그런데 저나 여러분 가운데 그 당연한 정체성을

잃거나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공인인데 사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대통령도 한 인간이고, 국회의원이나 공무원도 개인이지만

공적인 역할을 해야 할 곳과 시간에는 개인이 아닌 거지요. 

 

그래서 대통령이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

일곱 시간 동안이나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모를 때 비판을 하고

의원들이나 공무원들이 비상사태 때 골프를 치면 비판을 하지요. 

 

이처럼 저나 사제들이 필요할 때는 필요할 때는

수도복이나 사제복을 입고 수도자나 신부로 행세하지만

정작 수도자와 사제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때는

자기의 교회적 신원을 망각하고 개인으로 처신하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너무 자기중심적인 처신과 교회 운영입니다. 

 

오늘 디모테오서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집에는 하느님이 살아계셔야 하고,

하느님의 집은 진리의 기둥이요 기초여야 하는데

하느님의 집인 교회가 하느님은 살아계시지 않고

사제나 수도자가 왕처럼 군림하고 있고

진리의 굳건한 기둥과 기초이기는커녕

자기 말이 진리이고 자기 말대로 하라고 하곤 하지요. 

 

하느님도 없고 신자들도 없는 이런 자기중심적인 처신과 교회운영은

말할 것도 없이 지독한 교만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렇게 교만할 때 오늘 주님께서 맹비난하시듯

하느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신자들의 희노애락에 같이 해야 할 사제와 수도자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어겨가면서까지 고압적으로 교회를 이끌 것입니다. 

 

귓전을 간질이는 그런 얘기는 잘 듣지만

정작 들어야 할 말은 듣지 않고 요구만 하는 저는 아닌지

아프지만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