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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트라산타 마을의 성당 내부. 십자가 위 예수님께만 집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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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길에서 만난 이탈리아 여인 라우라. 순례를 하면서 자기 안의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는 그녀는 전봇대의 이정표를 가리키며 “이 길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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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정표. ‘VF’는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 gena)’의 약어. |
벗에게
토스카나의 숨은 보석이라는 작은 성곽도시 루카(Lucca)에서 소식 전합니다. ‘비아 프란치제나’(프랑스 길) 도보를 시작한 지 오늘로 41일째. 그동안 581㎞를 걸었고 로마까지 357㎞가 남았네요.
전 여정의 절반을 통과했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려서일까요? 며칠 비를 맞고 걸었더니 그동안 쌓인 피로가 터지면서 감기몸살을 심하게 앓았어요.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고요.
오늘은 내 생애 처음으로 하루에 30㎞를 걸었던 날의 이야기를 그대와 나누려 합니다. 사실 그 날은 ‘절묘하다! 이런 방법으로 하느님, 당신이 내게 말을 건네시는구나!’ 생각하고 감탄했던 일이 여럿 있었어요.
다 이야기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중에 한 가지, 로마 시대의 탑이 있는 산 위 마을에서 그 날의 목적지 사르차나(Sarzana)로 가는 산길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게요.
그날도 처음엔 그즈음의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어요. 바에서 크루아상과 카푸치노 한 잔으로 아침을 먹었고 연이어 내린 비로 눅눅하고 축축한 산길을 걸으며 “지긋하다, 이놈의 비 비린내.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어쩌지?” 투덜댔고
이정표를 따라 걷다 두어 번 산속에서 길을 잃었지만 아이패드에 저장해온 지도로 길을 찾았고.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된 것은 산길에서 만난 이탈리아 아주머니 덕분이었어요.
곧 밤이 된다 하니 두려움이 몰려와
산 위 마을을 내려와 작은 묘지 앞을 지날 때였어요. 후덕한 인상의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와 순례자냐, 사르차나까지 가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그러시더군요.
“서둘러요, 순례자. 여긴 산속이고 금방 밤이 와요. 그런 걸음으론 안 돼요. 빨리 걸어요!”
그 말에 처음으로 시계를 봤어요. 오후 5시가 가까웠더군요. 사르차나까지 남은 거리는 7~8㎞ 정도? 평탄한 길도 아니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은 산길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군요.
아침부터 연회색과 진회색을 오가며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어 어두워도 ‘날이 흐려서 그렇겠거니’ 생각하고 속 편하게 걸었는데 밤이 온다 생각하자 왈칵 두려움이 몰려오더군요. 그리고 마음이 급해지면서 절로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하느님, 제발 해를 붙잡아 밤이 더디 오게 해주세요. 밤에 산길? 자신 없습니다. 산길 벗어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해를 붙잡아주세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리고 지팡이로 길을 덮고 있는 풀과 나뭇가지들을 헤쳐가며 정신없이 걸었어요. 속으로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같은 기도를 반복했지요.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요? 어느 순간 내 걸음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한낮에도 무서워하고 힘들어하던 길, 예컨대 한쪽은 비탈로 막혀 있고 다른 한쪽은 벼랑처럼 깎여 있어 떨어지기 쉬운 길을 거침없이, 그것도 ‘나는 듯이’ 달려가는데 “이거 내가 걷는 거 맞아? 내 안 어디에 이런 걸음이 숨어 있었던 거야?” 깜짝 놀라 물었죠.
돌무더기 땅을 깃털 위 걷는 것처럼 가볍게
그리고 신기한 생각이 들어 내 걸음을 관찰했어요. 마치 다리가 자기 의지를 갖고 스스로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어요.
밤이 오고 있다는 불안감만 아니면 “멈춰!”라고 명령해서 다리가 내 말을 듣는지 아니면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는지 시험해보고 싶을 정도로 생생하고 강렬한 느낌이었어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했던 ‘몰입의 순간’에 나타난다는 현상이 이런 건가 싶었죠.
그런데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 그것만으론 설명이 안 되는 경험을 했어요. 야트막한 돌산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울퉁불퉁한 돌무더기 위를 걷는데 발아래 전혀 딱딱한 느낌이 없는 거예요.
오히려 솜뭉치나 깃털 위를 걷는 것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죠.
“신기하네.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그 손이 내 발을 받쳐주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곤 내 말에 내가 놀라 걸음을 멈추고 물었답니다. “아니, 그럼 하느님 당신이…?!”
벗도 알다시피 나는 믿음이 그다지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일에 시시콜콜 ‘하느님의 도우심’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면 얼마쯤은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그런 내가 사르차나로 오는 길에서 있었던 일을 하느님께서 “이놈아, 내가 너를 보고 있고 바로 지금 이곳에 너와 함께 있다!” 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메시지로 알아듣고 고백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비아 프란치제나에서 지낸 41일의 여정이 헛되지 않단 뜻이겠지요?
2015년 10월 17일
로마로 가는 길에서 그대의 벗 아가타 <문지온,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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