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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나를 지나면서 이정표에 로마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오르막이 많아 숨 가쁘게 걸어야 하는 날도 많지만 때로는 드넓은 포도밭이 펼쳐지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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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소를 구하는 데 도움을 준 아사빈(왼쪽)·일라리아씨. 여행을 즐기는 두 사람은 밤 늦게 낯선 도시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자신을 재워줬던 젊은 부부의 행동에 감동을 받은 후 여행자나 순례자들에게 각별히 친절하게 됐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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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로코 성당 앞, 옷자락 위로 드러나 두 발을 형상화한 청동상 ‘순례자의 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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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티나 성녀의 고향인 볼세나의 산타 크리스티나 성당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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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소식이 늦어 그동안 걱정이 많았지요? 미안해요. 걱정하는 거 뻔히 알면서도 여유가 없어 연락을 못했어요. 처음 며칠은 감기몸살 때문에, 몸이 좀 나아졌을 때에는 숙소가 있는 마을까지 걷느라 힘이 들어 여력이 없었어요.
그동안 부지런히 걸어 지금은 수트리(Sutri). 가이드북에 따르면 로마를 60여㎞ 앞두고 있는 오래된 마을에 와있어요.
날마다 새로운 길, 낯선 마을에서 자는 게 일상이다 보니 그동안 쌓인 이야기가 많아요. 하지만 오늘은 한 이탈리안 커플에게서 배운 것을 나누고 싶어요.
바에서 일하는 청년 아사빈(Asabin)과 연상의 여자친구 일라리아(Ilaria) 커플인데요,
이들을 만난 곳은 산 퀴리코 도르치아(San Quirico d‘Orcia, 이탈리아 중부 시에나에서 35㎞ 정도 떨어진 마을) 예요. 저녁 8시가 갓 넘은 시간이었고, 반쯤 혼이 나가 있는 상태였어요.
뭐가 잘못됐는지 아침에 전화로 예약하고 떠난 순례자 숙소가 문을 닫아 새로 잘 곳을 구해야 할 상황이었거든요.
베들레헴 가는 길 요셉 성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예기치 않은 상황에 당황하는 편이지만 낮이라면 그렇게 넋이 나가진 않았을 거예요.
관광 안내소를 찾아가서 사정을 말하고 새로운 숙소를 소개받거나 구경삼아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적당한 곳을 골라 들어가면 되니까. 그런데 밤이란 것,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사람을 당황하고 두렵게 만들더군요.
난감한 상황에서 어찌할까 고민하다 가까운 호텔 사무실을 찾아가 순례자들이 머물 만한 곳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호텔은 하루에 100유로. 순례길이어서 더욱 그랬지만 관광을 왔다 해도 하룻밤 잠자리에 그만한 돈을 쓸 생각은 없었거든요.
한 군데를 소개받아 약도를 보고 찾아갔지만 주인인 듯한 할머니는 이층에서 창문만 열고 내려다보면서 쏘듯이 한마디 하시더군요. “방 없어!” 순간, 그 할머니가 얼마나 매정하게 느껴지던지….
불빛 없는 변두리 마을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어 잰걸음으로 마을 광장으로 돌아오며 생각했죠. 그 옛날 인구조사를 받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서 방을 구하던 요셉 성인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분은 가장이고 만삭인 아내가 고된 여정에 힘들어하는 모습으로 곁에 있었을 텐데 방을 구하지 못하는 심정이 얼마나 힘들고 참담했을까?
난 홀몸인 데도 ‘그깟 숙소 문제 하나 해결 못 하나?’ 싶은 생각에 우울해지는데 가장으로서 그분이 느껴야 했던 감정의 깊이와 질감은 어떤 것일까?
그런 생각과 기분이 얼굴에 나타났던 것일까요? 따뜻한 차로 몸부터 녹이고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성당 근처 바에 들어갔는데 가게에서 일하던 젊은이가 묻더군요.
순례자인 것 같은데 잘 곳을 아직 찾지 못 했느냐고. 아사빈이었어요. 그렇다고 했더니 가게 한쪽에 앉아있던 여자를 불러 무어라 하더니
“내 여자친구 일라리아가 너를 도와줄 거야. 일라리아가 그러는데 네가 원한다면 자기 집에서 자도 좋대. 하지만 그게 불편하면 네가 원하는 숙소를 찾도록 도와주겠다니 네가 원하는 걸 말해” 하더군요.
상상도 못한 친절에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그때까지 곁에서 환하게 웃고만 있던 일라리아가 말을 거들더군요.
“지금 네 기분이 어떤지 알아. 우리도 낯선 곳에 밤늦게 도착해서 잘 곳이 없는 바람에 고생했던 경험이 있어. 밀라노에 갔을 때였는데, 한 젊은 부부가 우리를 자기 집에서 재워줬어.
우린 그 부부가 해준 것을 너에게 해주고 싶어. 미리 말하는데 내가 사는 곳은 아파트야. 거긴 호텔이 아니라 내가 사는 집이야. 그러니까 넌 어떤 것도 지불해서는 안돼.”
행복한 고민에 빠져
얼마나 고맙던지…! 초면에 신세를 지는 게 부담스러워 친절은 고맙지만 마을에 B&B (침대 하나와 아침을 주는 숙박형태로 1Bed 1Breakfast의 약자)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했지요.
마침 바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좋은 숙소가 있어 짐을 풀고 늦은 저녁을 먹는데 일라리아가 했던 말, “우린 그 부부가 해준 것을 너에게 해주고 싶어.”
이 울림이 떠오르면서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되더군요. 비아 프란치제나에서 많은 사람에게 받은 것들을 나는 누구에게 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벗아. 커다란 이변이 없는 한 며칠 후면 파파가 계신 곳, 로마에 도착할 거예요. 지금껏 직접적으론 말하진 않았지만 왜 모르겠어요?
벗과 친구들을 포함, 한국에 있는 많은 이들의 기도와 보이지 않는 도움에 힘입어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다음 소식은 로마에서 전할게요.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은 이만….
2015년 11월 5일
로마로 가는 길에서 아가타 <문지온,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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