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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람한 기둥들 사이로 성 베드로 대성당 지붕이 보인다. 파파가 살고 있는 곳이라 찾아간 로마와 바티칸. 그러나 커다란 기둥 뒤에 계실 파파를 생각하니 갑자기 다가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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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에 진입했음을 알려주는 성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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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의 열쇠를 가진 베드로 사도상. 때마침 성상 머리 위에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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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벗에게
로마에 있는 작은 호텔에서 벗에게 소식 전합니다. 긴 여정이 끝났습니다. 지난 11월 8일 오후에 이번 순례의 목적지인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 도착했거든요.
지금은 아침, 저녁으로 한식이 나오는 호텔에 머물며 자고, 먹고, 산책 삼아 가까운 공원을 다니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덕분에 걷는 동안 8kg이나 빠졌던 몸무게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 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열흘이 지났지만 아직도 로마에 도착했던 날 느꼈던 기분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라 스토르타(La Storta)에서 15㎞를 걸어 성 베드로 광장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북적대는 사람들이었어요.
대개가 관광객 같았는데 줄을 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바로 단념하고 말았어요. 긴 여정의 끝을 사람들로 붐비는 성당에서 제대로 마무리하기가 어렵겠다 싶었지요.
해서, 다음날 새벽에 베드로 성인의 묘소를 참배하기로 하고 광장에 서서 파파가 계신 곳을 눈으로 찾았습니다.
긴 여정의 끝에서 느끼는 허망함이 문득
멀리 12사도상 위로 보이는 바티칸의 코발트 빛 지붕이 보이더군요. 순간, “왔다! 이젠 끝났고, 꼬맹이와의 약속을 지켰어!” 하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방향 감각을 상실한 느낌이 들었어요.
뭐랄까,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주던 이정표가 사라지고 할 일이 없어져서 뭘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지금껏 나를 단단하게 묶고 있던 무언가, 미숙하고 불안한 걸음이었을 망정 나를 걷게 하였던 어떤 것이 사라진 기분이었어요.
긴장이 풀어져서일까요? 아니면 광장 가득 내리쬐는 따뜻한 햇살 때문이었을까요?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길래 광장 앞 차가운 돌계단에 배낭을 풀고 앉아 마음을 추슬렀어요.
아직 할 일, 파파께 편지를 전할 일이 남아있으니 맥 놓지 말라고요. 그리고 무사히 로마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이패드를 열었어요. 여러 통의 메일이 와있었어요.
그대를 포함, 한국의 지인들과 ‘비아 프란치제나’에서 만난 외국 순례자들이 보낸 것이었어요. 로마에 잘 도착했는지 궁금해하는….
간단히 잘 도착했다고 답하고 마지막으로 그대가 보낸 메일을 열었어요. 전날 라 스토르타의 순례자숙소에서 썼던 내 글에 대한 답신이었어요.
로마 입성을 앞두고 그동안의 여정을 돌아보니 고된 길을 잘 버텨준 내 몸과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도움을 주고 사라지던 비아 프란치제나의 천사들,
그리고 한국에서 기도로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 선후배들이 생각나 눈물 찔끔 흘렸다는 말에 그대는 이렇게 답했지요.
날 안아주고 토닥여주실 분은 하느님
“오늘 그대를 기억하며 미사를 봉헌했네요. 순례의 길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바라요. 환하게 웃으시며 ‘잘했다 내 사랑스러운 딸아!’ 하시며 당신 품에 안고 등 토닥여 주실 거예요.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신 것 같네요.
덤으로 더 많은 축복도 주실 것이라 믿어요. 정말 수고 많았어요. 참 잘했어요, 짝짝짝! 이제는 생명의 길을 걸어가요. 화이팅!”
어쩌면 그대는 내가 순례를 떠나기 전부터 내 마음속의 아버지, 잃어버린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존재로 파파를 찾아나선 이 길이 바로 하느님께로 통하는 여정이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먼 길을 걸어 찾아온 나를 안아주고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내가 와서 기쁘다고 등 토닥이며 말씀하실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써놓았네요. 필요한 시기에 맞춤해서 도착한 그대의 메일, 참 좋고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먼발치에서나마 파파를 뵈었어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알현식이 있었거든요. 이탈리아어로 말씀하시는 것인지 대부분은 못 알아들었는데 유일하게 들리는 말이 있었어요.
“문을 열어라(Open the door)!” 영어로 여러 번 강조해서 말씀하셨어요. 내게 필요한 말이라 생각해서 진지하게 자문했어요. ‘내가 닫고 있는 문, 그래서 파파의 말씀처럼 열어야 하는 문은 뭐지?’ 하고.
순례길에서 있었던 일과 맞물리면서 문득 떠오른 답이 있었어요. 지금은 말하기가 머뭇거려져요. 그 답이 내 안에서 영글어 쉽고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때, 그때 이야기하고 싶어요.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대학 시절부터 생각해온 문제이기도 하니. 어쩌면 다음번 편지나 한국에서 우리가 만날 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은 이만.
2015년 11월 18일
로마에서 그대의 벗 아가타
<문지온,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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