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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파파께
파파께서 이 편지를 보실 때면 저는 한국에 돌아가 있겠지요. 파파, 저는 한국에서 온 순례자 문지온 아가타입니다.
한 통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산 베르나르도에서 출발, 파파가 계신 로마까지 1000여㎞를 걸었고 지금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인 아시시에서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여정을 마무리하며 파파께 이 편지를 씁니다. 파파를 생각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파파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도보에 지치고 힘들 때도 많았고 비 오는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날이 연이어질 때는 이 순례를 계속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파파, 그런 고민을 하는 순간조차도 행복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 길 끝에 파파가 계시고, 제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처럼 고통 속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요, 파파. 저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에 제가 겪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파파께 전하는 것이었어요.
어느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이 스스로 세상에서 자기 존재를 지웠을 때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겪는 슬픔과 죄책감, 무력감에 대해서.
어떻게 고통에 파괴되지 않고 강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여쭙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고통에 파괴되지 않고 그 고통을 통해 더욱 깊어지고 강해질 수 있는지. 파파라면 깊은 이해와 공감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해 들으시고 진심으로 말씀해주실 것 같았거든요.
그가 택한 죽음의 방식으로 한 사람의 전 생애를 잘못된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요. 아버지를 대신해서 따뜻하게 안아주시며 이렇게 말씀해주실 것도 같았습니다. “그동안 힘들었지? 딸아, 잘 왔다.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힘이 났고, 그래서 비 오면 비 맞고 바람 불면 바람 맞으면서 로마까지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만큼 가까운 곳은 아니었지만 성 베드로 광장에서 파파를 뵙고 파파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지요. 그 날 파파는 교회를 향해, 또 우리 각자를 향해 여러 번, 간절하게 호소하셨습니다. “문을 여세요(Open the door)!”
파파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문했습니다. “나는 무엇에 닫혀 있지? 내가 열어야 하는 문은 뭘까?”
대학 시절에 썼던 논문의 주제(창세 12,1-4 아브라함의 소명)와 순례길에서 있었던 경험들이 떠오르고 서로 맞물리면서 대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어요. 바로 ‘하느님의 계획’ 앞에 나 자신을 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에게 편안하고 익숙했던 모든 것을 떠나 ‘하느님이 보여주실 곳’을 향해 갔던 아브라함처럼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 이정표가 로마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믿기에
날마다 새롭고 낯선 길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순례자의 마음으로. 그렇게 걷는 길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순례하는 동안 여러 번 경험했거든요.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존재가 돼 주셔서
파파, 믿고 의지하던 사람을 속수무책으로 잃어본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존재, 마음속 깊이 믿고 존경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인지! 우리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파파를 통해 잃어버렸던 사람과 세상에 대한 믿음을 찾을 수 있었고, 파파를 찾아 나선 길에서 ‘길 위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길 위에 서는 것이 예전처럼 두렵고 불안하지만은 않습니다. 어쩌면 파파가 강조하신 ‘거리로 나가라!’는 말씀을 살아볼 용기도 낼 수 있을 것 같고요.
힘든 만큼 행복했던 순례를 마무리하면서, 저는 또 다른 상상을 해봅니다. 언젠가 파파가 그리워하는 ‘거리’에서 이웃에 사는 평범한 할아버지를 만나듯 파파를 만나고 파파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모습을요.
서로에게 아이스크림 값을 미루면서 티격태격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고요. 그만큼 허물없고 친근한 사이란 뜻이니까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그런 날이 오기를 꿈꾸며, 파파, 지금 같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래 계셔주세요. 파파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2015년 11월 23일
파파를 사랑하는 아가타 올림
<문지온,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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