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12월 4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사제 학자)

dariaofs 2015. 12. 4. 05:46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Joannes)은 그리스 교부로서는 마지막 인물로 그리스도교적 아리스토텔레스 학풍을 개척한 분이며, 성 로마누스 작곡가(Romanus the Melodist)와 더불어 동방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아랍인들이 635년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마호메트의 후계자인 칼리프들의 치하에서 전 생애를 보냈지만, 성 테오도루스 스투디테스(Theodorus Studites, 11월 11일)와 더불어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성상 공경 논쟁이 가장 극심하던 시기에 끝까지 성상 공경의 정당성을 펼쳤던 위대한 교부이다.

성 요한은 그의 대표작인 “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에서 교회의 가르침 곧 하느님과 창조, 인간론, 그리스도론, 마리아론, 성인 공경과 성화 공경, 구원론, 종말론을 100장에 걸쳐 다루었다. 이 저서는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의 "신학대전"에 버금가는 역저로 동방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교육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때의 다마스쿠스는 아랍인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칼리프들은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쳤다. 성 요한의 가문은 몇 세대에 걸쳐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고위 관리였고, 이 직책은 세습제였다. 그래서 요한은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부친이 직접 그에게 교육을 시키고, 말 타는 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부친 외에 요한은 코스마(Cosmas)라 부르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코스마는 그에게 여러 학문을 가르쳤는데, 특히 신학을 강조했다. 장성한 요한은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여 국가의 관리가 되었다.

 

그는 궁중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적 덕행, 특히 겸손한 자세로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가 이토록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그의 스승 코스마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후임 칼리프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포기하자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고위 관직을 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직하고 코스마와 함께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 사바(Mar Saba) 수도원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분위기는 아직도 성상 공경 문제가 쟁점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도자들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어쨌든 요한과 코스마는 책을 저술하거나 찬미가를 짓는 등의 일을 하면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장상과 다른 수도자들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도 그는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게 처신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모님은 그의 스승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대의 제자에게 많은 책을 쓰고 또 아름다운 시를 쓰도록 허락하여라.” 이때부터 요한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성서와 교부 문헌 연구 및 저술 활동에 할애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다마스쿠스 거리로 나가 광주리를 팔았다고도 한다. 이때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인 요한 5세는 그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코스마를 마유마의 주교로 축성하고, 성 요한은 사제로 서품하여 예루살렘으로 불렀다.

그런데 코스마 주교는 죽을 때까지 주교로서 양떼를 돌보았으나, 성 요한은 이내 수도원으로 되돌아와 자신의 저술을 다시금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이때부터 그의 저서는 도처에서 읽혀졌으나 반대자들의 질시 또한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시인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754년 12월 4일 고령으로 선종해서 마르 사바 수도원에 묻혔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0년 8월 19일 교령에서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강론   :   (마태 9,27-31)

 

<눈 먼 두 사람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마태 9,27)."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눈 먼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시여' 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그들이 청하는 '자비'가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청하는 '자비'는 메시아만이 줄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몇 푼의 돈은 지나가는 나그네도 줄 수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일은 의사들이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그래서 '눈 먼 사람 둘'이 메시아께 청한 것은 '구원'인데,
여기서 '구원'은 '새로운 인생'과 하느님의 나라에서의 구원을 모두 뜻합니다.
물론 눈을 뜨는 것까지 포함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9,28)."

 

'그런 일'은 '구원을 주는 일'을 뜻합니다.
"너희는 믿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소문만 듣고 믿는 그들의 믿음을 자신들의 믿음으로 강화시켜 주기 위한 질문이고,
남이 하는 말을 따라 하는 고백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고백을 하도록 인도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이라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고 확신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마태 9,29-30ㄱ)."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라는 말씀은,
"너희가 믿은 대로 내가 너희에게 구원을 주겠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너희가 청한 구원을 줄 테니 이제부터 새로운 인생을 살아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눈이 열렸다는 말은, 보지 못하던 그들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고,
동시에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완전히 다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눈'(힘)입니다.
이제부터 제대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또는 다른 누가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1)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희망한다고 해도,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른다면
눈 먼 상태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눈 먼 사람들'은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류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시는 분이고,
또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앞장서 가시는 분입니다.
만일에 올바르게 인도하시는 분을 따라가지 않고 다른 '눈 먼 이'를 따라간다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입니다(마태 15,14).

 

2)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희망한다고 해도,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면(자기의 현재 상태를 모르고 있다면),
그것도 역시 '눈 먼 사람'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보면,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한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았다는 뜻이고,
동시에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메시아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구원받을 길이 없는 비참한 존재.
(그래서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우선 먼저 자기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또 자기들은 구원을 받았다고(또는 틀림없이 받는다고) 자만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3)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잘 모른다는 점에서도 인간은 누구나 눈 먼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신앙생활은 눈을 뜨기 위해서(제대로 보기 위해서)
한 단계씩 나아가는 과정입니다(마르 8,22-25).
처음부터 바로 완성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꾸준히 노력해서 차츰 하느님께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1코린 13,12)."

 

"벌써 12월이다. 벌써 한 해의 마지막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면서, 또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면서
정신없이 달려가기만 하는 '눈 먼' 인생.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으면서, 자기 욕심대로만 사는 인생.
자기는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제자리에서 뱅뱅 돌기만 하는 인생.

 

지금은 "벌써 12월이다." 라고 말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벌써 인생의 종점이다." 라고 말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말을 할 때까지도 계속 눈 먼 상태로 살 것인가,
지금이라도 눈을 뜨려고 노력할 것인가?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