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2월 5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dariaofs 2016. 2. 5. 04:06




불확실한 전설이지만 성녀 아가타는 시칠리아(Sicilia) 섬의 카타니아 혹은 팔레르모(Palermo)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신심이 깊어 하느님께 스스로 정결을 서원하였다고 한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기간에 그 지방의 집정관이던 퀸티아누스(Quintinianus)가 그녀를 탐해 그녀를 소유하려는 계략으로 박해를 이용하였다.


그녀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퀸티아누스는 온갖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그녀를 매음굴로 보냈으며,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죽을 때까지 이글거리는 석탄불에 돌리면서 구워 죽였다고 전해온다. 교회미술에서 그녀는 보통 한 쌍의 집게나 접시에 담은 그녀의 가슴으로 묘사되었는데, 후일 이것이 잘못 전해져 접시 위의 빵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성녀 아가타의 축일에는 빵을 축성하는 관습이 내려온다. 성녀 아가타는 처녀, 양치는 여자, 종 만드는 사람, 유리 제조공, 광부, 알프스 등반 안내자, 간호사들의 수호성인이자 불과 날씨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강론   :   (마르 6,14-29)


<헤로데>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에 대해서 말할 때,
복음서의 표현만 보고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16)."
라고 헤로데가 말한 것에게 대해서,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 내용을 생각하면,
그의 말은 '양심의 가책'을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미신적인 불안감'을 나타낼 뿐입니다.
"사람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생각하던데, 내가 죽인 요한이 정말로 예언자였을까?
예수라는 자가 정말로 되살아난 요한일까?
그렇다면 혹시라도 나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그런 정도의 불안감.


헤로데는 요한을 죽인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그때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그 여우' 라고 부르셨습니다(루카 13,32).
'여우' 라는 말은, 헤로데가 교활하고 간사하고 비겁한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
즉 살인도 할 정도로 악한 인물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만일에 그가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면,
다시 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마르코복음 6장 20절,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를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만 보면, 헤로데는 요한을 두려워했고, 요한을 보호해 주었고,
요한이 하는 말을 기꺼이 들었던 사람,
즉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사람입니다(마르 6,17).
그 일은 요한을 두려워하면서 보호해 주었다는 말과 거리가 멉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두려워하기는커녕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또 그가 요한을 감옥에 묶어 둔 것은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요한의 말이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요한이 하는 말을 기꺼이 들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언자의 말이 듣기 싫어서 죽여서라도 입을 막으려고 한 자입니다.


그런 상황을 생각해서 다시 해석하면,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는 말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다." 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두려워했다는 말도 '미신적인 불안감'을 뜻합니다.
(요한을 건들면 자기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 같은 것.)
헤로데가 요한을 보호해 주었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특히 헤로디아가
자기 허락도 안 받고 함부로 요한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권위를 침해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 뭔가 불길한 일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말을 기꺼이 듣곤 하였다는 말은,
펠릭스 총독이 감옥에 있는 바오로 사도를 불러내어
이야기를 들었던 것과 비슷한 일로 해석됩니다(사도 24,24-26).
헤로데는 펠릭스처럼 뭔가 새롭고 신기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망,


또는 호기심 때문에


요한을 불러내서 그의 말을 듣는 것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3) 마르코복음 6장 26절을 보면,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라고 되어 있어서,
헤로데가 요한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몹시 괴로워했던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 장면에서 헤로데의 괴로움은, 요한을 죽이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 아니라,
자기가 경솔하게 맹세한 것에 대한 괴로움으로 해석됩니다.


헤로데는 공주에게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마르 6,23)." 라고 맹세했었습니다.
그런데 왕국의 절반을 자기 마음대로 누군가에게 줄 권한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영토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는 것을 괴로워하기는커녕 기뻐했을 것입니다.
지키지도 못할 맹세에서 풀려날 수 있었기 때문에...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라는 말은,
"맹세까지 한 것에 대해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라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헤로데 같은 자가 통치 권력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통치 권력을 차지한 자가 헤로데처럼 폭군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한을 죽인 헤로데와 헤로디아,
하수인 역할을 한 소녀, 요한을 죽이라는 명령을 실행한 경비병들,
침묵을 지키면서 방관한 고관들과 무관들과 유지들...
그들은 모두 요한을 살해한 범죄의 공범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자들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이 박해를 받고, 살해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회개해서 구원을 받으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하느님을 거스르고 예언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헛되지 않습니다.
(예언자를 죽여도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나중에 로마 황제 칼리굴라에 의해 쫓겨나서
갈리아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전주교구 신풍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