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9월16일 다해 연중 제24주간 금요일(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 순교자 기념일)

dariaofs 2016. 9. 16. 09:00





 

성 고르넬리오 교황 순교자

로마(Roma)의 사제이던 성 코르넬리우스(또는 고르넬리오)는 성 파비아누스(Fabianus)의 순교 이후 거의 14년 동안이나 지연되어 오던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황 선출이 지연된 것은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문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이룬 주요 업적은 박해 동안에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과의 화해 정책이다. 그는 배교자들의 합당한 통회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한 반면, 배교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단죄하고, 교회가 그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일파를 공격하던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를 끝까지 옹호하였다.

 

 한편 그는 배교자를 용서하는 권한이 교회에는 없을 뿐더러, 이제 자신이 교황이라고 선언했던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와 그를 정점으로 모인 엄격파들을 단죄하여 교회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노바티아누스는 첫 번째 대립 교황이었다.

노바티아누스의 극단주의를 옹호하는 무리들은 재차 힘을 규합하였고, 동방에서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코르넬리우스는 교회가 통회하는 배교자들을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재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코르넬리우스의 제의로 251년 10월에 개최된 서방 주교들의 시노드(Synod)는 노바티아누스 일파의 가르침을 단죄하고, 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

황제 갈루스가 253년에 또 다시 그리스도교 박해를 재개하자, 그는 첸툼첼레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하였다.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200-21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유복한 이교 가정에서 내어난 성 타스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 또는 치프리아노)는 수사학자이자 법률가였고 또 교사였다. 그는 246년경 속세의 불의와 부패에 회의와 실망을 느끼던 중 하느님의 은총으로 노사제인 코일리키우스(Coelicius)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즉시 당대의 저명한 성서학자이자 유명한 저술가가 되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후 그는 사제품을 받았고, 249년 초에 카르타고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249년에 일어난 데키우스(Decius)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피신하였으나, 은밀히 피신처에서 편지 등을 보내는 방법으로 자기 교구를 계속 지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피신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251년에 교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많은 교구민들이 박해 동안에 배교하였고, 또 자신의 주교 선임을 반대하던 사제 노바티아누스(Novatianus)가 이단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노바티아누스 신부는 배교한 신자들에게 아무런 회개 행위도 요구하지 않고 교회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지나친 관대함을 나무라고, 박해 당시 배교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규율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죽을 위험에 처한 배교자를 제외하고는 새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배교자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유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251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된 성 코르넬리우스(Cornelius, 9월 16일)가 배교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 노바티아누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바꾸어 배교자들은 영원히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는 배타적인 엄격주의자로 돌변하였다. 로마(Roma)의 주교로 선출될 것을 기대했던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대립교황으로 등장하며 이교적인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즈음에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가톨릭 교회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와 "배교자들에 관하여"(De lapsis)를 저술, 배포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오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안에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하였다.

배교자 문제가 해결된 지 얼아 안 되는 252-254년 사이에 아프리카 지역에 몸서리치는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이를 물리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를 반대하는 이들과 신자들은 흑사병을 그리스도교와 성 키프리아누스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며 박해의 빌미로 삼았다.

 

즉 그리스도교 신자들 때문에 하늘이 분노하여 전염병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사람들의 낭설을 반박하고 위로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데메트리아누스에게"(Ad Demetrianum)과 "죽음에 대하여"(De mortalitate)라는 책을 썼다.

그 후 얼마 뒤에 그와 아프리카의 다른 주교들은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황은 이단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이 베푼 세례도 유효하다고 인정한 반면, 그들은 이를 극구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255년 성 키프리아누스는 지역 주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카르타고에서 주교회의를 열고 이단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성 키프리아누스는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당시 로마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또 모든 주교와 사제와 부제들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 예식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지방 총독인 파테르누스에 의하여 카르타고에서 50마일 거리에 있는 쿠루비스로 유배되었다.

 

 또 다음해에는 모든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새 총독인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소환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끝까지 이교의 신에게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여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는 교회, 사목, 성서, 성사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하여 박해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13편의 저서와 65편의 서간들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강론   :     (루카 8,1-3)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여기서 ‘시중을 들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일과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고,
또 복음서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는 이야기(마태 12,1),
빵이 한 개밖에 없다고 제자들이 걱정했다는 이야기(마르 8,14-16)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여자들의 후원 덕분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풍족한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여자들은 각자 형편에 따라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수님과 사도들을 도와드렸던 것 같은데,
그것이 항상 넉넉하고 충분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굶게 되는 상황에서는
여자들도 함께 굶지 않았을까?)
어떻든 루카복음서 저자가 복음서에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은
‘여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다녔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이 내용에 대해서,
“사도들은 전부 남자인데, 시중을 드는 사람은 전부 여자다.
이것은 남녀 차별이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이 내용은 차별이 아니라 역할이 구분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사람마다 다른 탈렌트를 받는 것은 차별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공평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에 여자들이 시중드는 것을 남자인 사도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다면,
또 여자들을 아랫사람처럼 대하면서 자기들은 윗사람인 것처럼 행세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 주님이신 분입니다.
신앙인은 자기를 ‘섬기는 주님’이신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윗사람도 없고 아랫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섬기고 서로 시중을 들 뿐입니다.
(굳이 누가 더 높으냐고 묻는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시니 섬기는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말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남존여비나 남녀차별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시절의 여자들의 역할과
사도들이 교회를 다스리던 시절의 ‘일곱 봉사자’의 역할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3).”


사도들의 말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시절에 여자들이 했던 일을 기억해 내고
일곱 봉사자를 뽑은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복음 선포에 전념하고 여자들은 시중을 들던 모습과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념하고
일곱 봉사자는 식탁 봉사에 전념하는 모습이 많이 비슷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1코린 12,18-21).”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


또 교회 공동체를 건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에페 2,20-21).”


‘몸’으로 표현하든지 ‘건물’로 표현하든지 간에
교회 공동체 안에는 필요 없는 사람도 없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필요하고,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시중을 들면서 따라다녔던 여자들도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한 일들도 중요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만큼이나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일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비하해도 안 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작은 일들이 모여서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는 큰 일이 이루어집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