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9월17일 다해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오상 축일,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조 주교 학자)

dariaofs 2016. 9. 17. 06:47



오상을 받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조 주교 학자

성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또는 로베르토)는 1542년 10월 4일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몬테풀차노에서 태어나 1560년 10월 예수회에 입회하여 1570년 3월 2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당시 교회는 종교 개혁자들에 대항하느라 교부학과 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경시되던 상태였다. 토스카나 지역의 유망한 젊은 학자로서 그는 종교 개혁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교리를 체계화하고 성서를 연구하는 두 가지 일에 그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루뱅(Louvain)에서 예수회 회원으로는 처음으로 교수가 된 사람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그의 강의록을 바탕으로 세 권으로 된 “이단 반박론”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교황의 세속권과 평신도의 역할에 관한 부분들이다. 그는 ‘왕권신수설은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분노를 초래했으며, 또한 로마 교황의 세속권을 발전시켰다. 비록 그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인 버클레이와 대항하여 교황을 옹호했지만,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벨라르미노는 1599년 ‘학식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추기경이 되었다. 벨라르미노는 바티칸 궁전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이 실천해 오던 내핍생활을 전혀 완화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만을 먹으면서 거의 아주 필수적인 것 이외에는 가계비 지출을 제한했다.

 

그는 군에서 탈영한 한 군인의 몸값을 치렀고, ‘벽은 감기 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기 방의 커튼을 가난한 사람의 옷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알려진다. 그의 많은 활동 가운데 그는 특히 교황 클레멘스 8세 시대의 신학자로서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두 개의 교리서를 준비했다.

벨라르미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논쟁은 1616년에 일어난 일로 그가 찬양하던 자기 친구 갈릴레이에게 충고를 해야 했던 것이다. 벨라르미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성서에 위배된다고 결정한 신앙교리 성성을 대신하여 충고를 했다. 이 충고는 아직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것을 가설 이상으로 지나치게 비약시키는 데 대한 하나의 본보기였다.

벨라르미노는 1621년 9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성 과정은 1627년에 시작했으나 그의 저서에서 연유된 정치적 이유로 인해 지연되다가, 1923년 5월 13일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1930년 6월 29일 시성되었다. 1931년에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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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귀>란 무언인가?

들을 수 있는 귀, 달리 말하면 귀의 능력을 뜻하는가?

아니면 들으려고 하는 귀, 곧 귀의 의지를 뜻하는 것인가?

제 생각에 들을 귀란 두 가지를 다 포함하는 말일 것입니다.

   

들을 귀란 우선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가는귀가 먹거나 귀가 완전히 먹은 사람은 잘 못 듣거나 완전히 못 듣는데

영적으로도 하느님 말씀을 잘 못 듣거나 완전히 못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영적으로 가는귀먹은 사람에 대해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는데

첫째는 마음이 길바닥과 같은 경우입니다.

비유에서는 길에 떨어진 씨라고 했지만

좀 더 실감이 나게 제가 길바닥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길바닥이란 장바닥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길바닥과 같고 씨가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 모르게 잘 간수하지 않고

길가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채 가도록 내버려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으로 내놓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지요.

저의 경우 매일 복음을 읽지만 말씀을 제 마음에 새기기보다

여러분에게 말씀 나누기를 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이 바위와 같은 것입니다.

바위란 흙이 거의 없는 곳이니 바위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내게 떨어져도 영 뿌리내리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 씨는 비바람에 쓸려가거나 뙤약볕에 말라버리겠지요.

하느님의 말씀도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면

환난이나 시련을 겪게 되면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마음에서 밀어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를 사랑하시기에 결코 버리지 않으실 거라는 말씀이나

인간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고 언젠가는 구해주실 거라는 말씀도

막상 내가 고통을 당하고 그 기간이 길어지면 거짓말이라고 믿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이렇게 믿습니다.

환난이나 시련은 약한 신앙의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불신케도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굳세어지도록 단련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 번째는 마음이 가시덤불과 같은 것입니다.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이란 걱정, 재물욕심, 쾌락이 무성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상 작은 걱정꺼리 하나만 생겨도 그것이 분심이 되어

아무리 기도하려 해도 기도할 수 없었던 경험이 우리에게 다 있지요.

걱정 하나도 이러하니 우리 마음 안에 큰 욕심이 들어앉아 있거나

쾌락에 빠져 생각이 온통 그것뿐이게 되면

하느님 말씀은 도무지 들어갈 수 없게 되겠지요.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하는 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런 것들보다 더 고약하게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가장 완벽하게 우리 귀를 틀어막는데

듣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교만한 사람은 자기 말만 하지 남의 말은 완전히 무시하지요.

이것은 가는귀먹은 정도가 아니라 영적인 감각이 완전히 죽은 겁니다.

하느님 말씀조차 우습게 생각하는 이런 교만이 우리 맘 안에 자리하게 되면

아무 말도 들으려하지 않기에 그야말로 구제불능이지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들을 귀> 있는 사람입니까?

가는귀먹든 완전히 먹든 귀먹은 사람입니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