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지진의 공포가 여전하다. 땅이 흔들려서 공포스러운 게 아니라, 실은 내가 사라질까봐, 내 것이 없어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땅이 흔들려 사라질듯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 오히려 보호 본능이 더 강하게 작동하는 건, 꽤나 비루한 체험이다.
지진은 곧 사라질 것이지만, 또 다시 다가올 공포로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 역시 같은 논리가 아닐까. 예수는 눈에 보이지 않아 없는 듯하지만, 늘 우리 신앙의 중심이자 목적이다.
신앙이 순진한 자기 완성의 도사 놀이가 아니라면,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진의 공포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수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길 때가 적지 않다.
그 공포는 주로 내 것에 안주하고,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 강하게 작동한다. 온 세상을 얻을 수 있는 능력도 위치도 아닌 내가 온 세상을 얻어 나갈 듯 매일매일을 살다가 문득 예수의 삶과 괴리가 있음을 느낄 때면 두려움은 배가된다.
예수를 따르는 데 한계나 제한은 없다. ‘누구든’ 가능하다. 그러나 그 ‘누구든’은 자신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자로서 예수를 향할 수 있다.(‘버리다’의 그리스 말은 ‘아르네오마이 ἀρνέομαι. 곧 ‘아니다’라고 말한다는 뜻을 지닌다)
지향을 가지되 자신을 버리는 건 모순이다. 이 모순이 논리적이기 위해선 예수의 객관적 삶이 자신의 주관적 삶과 하나되어야 한다.
제 것이, 제 존재가 사라진 곳에 예수를 얻어 만날 수 있는 영광이 제 생명의 근원이자 목적이 될 때, 자신을 버리는 것이 목숨을 얻는 것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버림으로 얻어지는 목숨은 ‘누구든’ 더불어 함께 살고자 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뜻밖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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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땅이 흔들려서 공포스러운 게 아니라, 실은 내가 사라질까봐, 내 것이 없어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 ||
제 삶을 꾸려 나가고 거기서 보람을 얻는 건, 길어야 70년 근력이 좋아서야 80년이다. 제 삶의 기쁨은 잠시 잠깐 웃음을 주며 말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장치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신앙의 논리는 제 삶에서 해방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연습하는 데 있다. 더불어 산다는 건 낯설기도 하고, 때론 힘겨울 수 있다.
예수도 낯설고 그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 역시 낯설어서 예수는 그렇게 아프게 죽어 갔다. 예수가 죽어 간 그 자리에 하느님은 모든 이의 생명을 영원히 새겨 놓으신다. (2코린 5,14-15; 갈라 2,20; 1요한 3,16)
그러므로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서로에게 생명을 전해 주는 “아픈 기쁨”이다.
대개 신앙인들의 삶의 자세가 자신을 비워 내지 못한 채, 제 삶을 반성하는 것으로 정리되는 데 답답함을 느낀다. 각자도생의 길은 신앙이 아니다. 무턱 대고 기대며 더 많이 찾아 나서되, 더 많이 나를 비워 내는 일, 그게 신앙이다.
비워 낸 자리에 하느님은 또 다시 낯설게 우리를 찾아오신다. 신앙이란 게 별 건가.... 신앙은 지금 만나 뵙는 낯선 하느님을 포기하지 않는 허망한 내일에 대한 저항일 텐데.... 그 저항이 또 다른 생명을 살릴 것이라는 희망이 신앙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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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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