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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문화와영성] (22) 착한 사마리아인 - 송창현 신부

dariaofs 2017. 1. 15. 05:58

성경, 문화와 영성 (22)
착한 사마리아인



송창현(미카엘)|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뒤따르는 것, 즉 그분처럼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분의 비전(vision), 정신, 가치를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전이 잘 표현되는 자리 중의 하나가 바로 그분의 비유 말씀이다.


 이 비유 중에서 많이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이다. 렘브란트는 이 비유 말씀을 여러 차례에 걸쳐 동판화나 유화, 드로잉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다. 이 율법 교사의 관심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그 대답을 구한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다.


이 점에서 예수님과 이 율법 교사의 생각은 같다. 그러자 율법 교사는 다시 질문한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게 된다.(루카 10,30)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가 버렸다.


사제와 레위인은 유다인 중에서도 종교적 엘리트들이다. 유다인들의 율법에 충실했던 그들에게 중요한 가치는 자신들의 제의적 정결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초주검 당한 이가 죽어 있기라도 했다면 부정한 것과 결코 접촉해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강도당한 이는 이웃이 아니라 배제와 분리의 대상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경계가 존재했다. 그것은 정결과 부정의 경계이다. 여기서 사제와 레위인은 개인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 영성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이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돌봄을 실천한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종족간, 지역간의 경계, 정결과 부정의 경계를 뛰어 넘어 배제와 분리가 아닌 돌봄과 배려를 실천하게 하였는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동사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이다.


그리스어에서 이 동사는 “사람의 창자, 내장”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는데, 인간의 내면 깊숙이에서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 속마음이 절절한 불쌍함으로 움직여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 착한 사마리아인이 다양한 경계를 무효화하고 개인주의와 엘리트주의 영성의 배제와 분리를 넘어서 돌봄과 배려를 실천한 것은 강도만난 이와의 공감, 곧 “함께 아파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초주검 당한 이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4-35) 이와 같이 사마리아인은 고통당하는 이와 연대한다.


그를 고통에서 해방하려 행동한다. 이 해방 실천은 기름, 포도주, 노새와 함께 하는 생태적 연대이고, 여관 주인과 함께 하는 사회적 연대이다.


·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분리와 배제를 뛰어 넘는 “함께 아파하기”의 길을 제시하신다.


곧 그분은 당시 유다인들의 정결의 정치학에 도전하시고 “함께 아파하기”의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을 대안으로 제시하신다.


그것은 경계들로 갈라진 사람들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예수님의 정신과 가치가 살아 있는 자리이다.

 

렘브란트의 <착한 사마리아인>




· 렘브란트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해석하고 그린 여러 작품들 중에서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The Good Samaritan)이라는 제목의 두 그림을 살펴보려 한다.


첫 번째 작품은 렘브란트가 1633년에 에칭(etching), 즉 동판화로 그린 것으로 26.5×21.2cm의 크기이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레이크스 박물관(Rijksmuseum)에 소장되어 있다.


두 번째 작품은 1930년대에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26×21cm의 크기이며, 영국 런던의 월리스 컬렉션(Wallace Collection)에 소장되어 있다.


이 두 번째 작품은 렘브란트의 제자들에 의해 그려졌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제작 시기가 앞서 언급한 동판화보다 이전인지 이후인지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다.


· 첫 번째 동판화는 등장인물의 배치에 있어서 매우 치밀한 구조를 가진다. 그리고 흑백의 대비로 극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화면의 위쪽에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강도만난 이를 잘 돌보아 주기를 부탁하고 있고, 아래쪽에는 말과 주변의 인물들이 있다.


초주검이 된 이가 말에서 내려지고 있고 다른 사람은 말의 고삐를 잡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뒤편에 우물가의 여인이 있고 아래에는 개 한 마리가 용변을 보고 있다.


 이 여인의 모습과 개의 등장은 렘브란트 동판화의 일상적인 현실성을 강조한다. 여관 주인, 사마리아인, 강도만난 이, 그리고 개는 왼쪽 위의 모서리에서 오른쪽 아래 모서리로 이어지는 대각선을 이룬다.


렘브란트는 왜 착한 사마리아인의 장면에 개를 등장시킬까? 이 개의 의미에 대한 비평가들의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강도만난 이를 여관에 데려온 이 순간에 무관심한 듯 개는 용변을 보고 있다.


렘브란트는 이 개를 통해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가버린 사제와 레위인의 무관심을 풍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 착한 사마리아인을 그린 렘브란트의 유화는 앞서 살펴본 동판화와는 완전한 역방향으로 그려져 있다. 사마리아인과 여관 주인은 그림의 왼쪽에 배치되어 있다.


그림의 중앙에 흰말이 있는데, 한 사람이 강도만난 이를 말에서 내리고 있고 그 오른쪽에 다른 한 사람이 말의 고삐를 잡고 있다.


그림의 왼쪽 뒤편에 한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다. 그런데 이 유화에는 동판화에 등장했던 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예수님은 질문하신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 여기에서 예수님의 출발점은 길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의 상황이다. 이웃은 이런 저런 기준으로 우리가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길에서 만나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의 이웃이다. 이 이웃 사랑이 바로 영원한 생명에로 이르는 길이다.

·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함께 아파하기” 에토스는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사회적 비전이다. 그리고 우리 비유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는 예수님의 초대로 끝난다.


이 말씀은 고통 받는 이와 “함께 아파하기”의 실천에로의 초대이다. 그것은 갈라진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는 사회적 영성으로의 초대이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