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으로 ‘예수님 마음(성심, 聖心)’ 전하고 실천하는 성심당
▲ 성심당 대표이사 임영진(오른쪽)·김미진씨 부부가 가톨릭평화방송 TV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녹화 중 성심당의 이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
▲ 1967년 성심당. |
▲ 대전역사에 있는 성심당. 항상 손님으로 북적인다. 이힘 기자 |
▲ 성심당 케익부띠끄 |
▲ 2016년 설립 60주년을 맞았던 성심당. 빵으로 만든 ‘60’을 들고 있는 대표 부부. 성심당 제공 |
여느 동네 빵집보다 초라하게 시작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부두를 탈출해 거제와 진해를 거쳐 1956년 생계를 위해 가족을 데리고 서울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대전발 0시 50분 완행열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살길이 막막해 찾은 성당에서 신부님이 선뜻 내준 밀가루 두 포대. 가족의 식량으로 소비하지 않고 대전역 앞에 천막을 치고 찐빵 장사를 시작했다. 빵집 성심당은 이렇게 출발했고 굴곡의 60년이 지난 지금, 대전의 문화가 됐다.
400명 가까운 직원이 하루에 3만 개의 빵을 팔지만, 빵집은 대전에만 있다. 포콜라레 정신을 근간으로 한 ‘EoC’(모두를 위한 경제)를 실천하고 있다. 전 직원에게 매출 내용을 공개하고 이윤의 15%를 성과급으로 지급한다.
소유보다 나눔, 경쟁보다 상생을 추구하면서, 분배와 성장을 동시에 해결한다. 성심당의 부부 대표이사인 임영진(요셉)ㆍ김미진(아녜스)씨를 만났다. 서종빈 기자
▶성심당은 대전역에서 처음 시작했는데요. 하루에 빵은 몇 개나 팔리고 직원은 어떻게 됩니까.
세 군데에서 한 3만 개 정도 팔리고요. 직원도 400명 가까이 됩니다.
다른 빵집에 비해 빵이 좀 크다고 하시는데요. 지방에 오면 뭔가 푸짐하고 횡재한 것 같은 인심 좋은 그런 이미지가 있잖아요. 저희도 90년대엔 추세에 맞게 빵이 좀 작아졌다가 ‘성심당다움’을 찾아가면서 빵이 다시 커졌습니다.
▶김미진 이사님께서는 미술을 전공하셨는데요. 성심당만의 인테리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빵집의 경향이 계속 바뀌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성심당다운 빵집 스타일을 찾게 됐습니다.
창업주가 생각했던 본질에 맞추다 보니 가장 따뜻하고 보편적인 성심당만의 정체성을 갖추게 된 것이죠. 저희 사훈이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 12,17)라는 성경 말씀인데요.
너무 초라해서 부자가 못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또 너무 화려해서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 그런 빵집이 아닌 거죠. 저희 빵집에 딱 들어오면 무장 해제되는 빵집, 따뜻한 고향에 들어온 빵집, 그런 것이죠.
▶임영진 대표 선친께서 빵집을 창업하셨는데요.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버님은 독실한 신자셨죠. 우직하시고요. 이북에서 과수원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하셨습니다. 거제도로 피란을 갔다가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에 정착하려고 올라가던 길에 대전역에서 기차가 고장 나서 섰습니다.
서울 가도 특별히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대전에 내려 성당을 찾아가서 신부님께 사정 이야기를 한 거죠. 신부님께서는 미국에서 지원해준 밀가루 두 포대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밀가루를 가지고 대전역에서 생계를 위해 찐빵집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번에 60주년 전시회 제목이 ‘밀가루 두 포대의 기적, 대전의 문화가 되다’ 였는데요. 60주년 기념으로 6만 포대의 밀가루 미니어처를 만들어서 대전 시민들과 나눴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상호 ‘성심당’은 누가 작명을 하셨나요.
아버님이 하셨죠. 대전역에 쓰레기장을 치워서 천막을 쳤을 때 나무에다가 성심(聖心)이라고 간판을 걸었습니다. 초라한 천막 찐빵집에서 불경스럽게 예수님 마음이라는 성심을 썼다고 핀잔하는 분들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많이 이해해주시고 좋아하십니다. 아버님은 피난 나올 때 너무 어려워 가족들과 같이 살아남는다면 평생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겠다고 맹세를 했고
그래서 천막 찐빵집을 할 때도 주위에 굶는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주기 시작한 것이죠. 빵은 거의 어머님이 만드셨고 아버님은 나눠주는 역할만 하셨습니다.
▶그럼, 성심당은 어떻게 성장했나요.
기적이죠. 나눠주는 게 손실이 아니고 더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빵을 나눠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줬지만, 시민들이 볼 때에는 오래된 빵들이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더 많은 분이 오시고요. 나눠 줬지만, 더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큰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불만이 많았는데요. 평소에 어머님께서 아버님은 천당 가셨을 것 같은데 나는 지옥 갈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신부님이 어머님의 역할도 하느님께서 알아주실 것이라고 해서 굉장히 안심하시곤 했습니다. 두 분이 같이 천당에 가셨겠죠. (눈시울을 붉힘)
▶이 건물로 오신 게 어렸을 때였는데요. 임영진 대표께서 기억하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이 자리는 어떻게 보면 제과점 하기에는 상당히 나쁜 자리였습니다. 상권이 전혀 없는 데다 바로 앞에 성당만 있었죠.
아버님은 ‘성당 앞으로 이사 가면 자식들이 성당 종소리를 들으면서 기도를 할 것이다. 신앙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셨고, 그래서 이사를 오게 됐습니다.
어느 정도로 자리가 안 좋았냐 하면 주변에서 ‘저 노인네 망령들었다. 잘못 생각한다’고 했을 정도로 취급을 받으면서 이사를 한 거예요.
아버님은 기준이 확실하셨죠. 자식들의 신앙 때문에 이사를 한 것이죠. 당시엔 가장 나쁜 자리였지만 지금은 제일 번화한 곳이 됐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적이죠.
▶아버님께서는 어떤 점을 가장 강조하셨나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하느님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늘 행동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저희에게는 신앙생활만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복리 계산을 해주신다는 말씀을 정말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계산법이 다르다는 것이죠. 하나를 주면 열 개를 받고 복리로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도 아버님의 뜻에 따라 하고는 있지만 늘 부족합니다.
▶오늘의 성심당이 있기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죠.
60년 동안 참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화재도 있었고 사고도 많았고요. 너무 어려워서 부동산에 매매를 의뢰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비를 넘어서 60년을 맞았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시련을 통해 저를 굉장히 성숙하게 만들었고 회사를 단단하게 만들어 준 데엔 하느님의 어떤 가르침, 어떤 교육이 있었다고 느껴집니다. 내 힘만으로는 안 되고 오직 의지할 곳은 하느님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미진 이사님께서는 불이 났을 때 어떠셨어요.
2005년 1월 말에 불이 났는데 밸런타인데이와 설날을 앞두고 굉장히 바빴을 때에요. 남편은 피정 가 있었고 미사하고 저녁에 딱 나오는데 불났다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당 앞이니까 바로 보이죠. 화재 현장으로 뛰어가다가 순간적으로 내가 불을 끌 것도 아닌데 라는 생각에 다시 성당으로 돌아가 아무도 없는 감실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당신만이 나의 유일한 행복이십니다” 하고 크게 외쳤어요.
외치고 나니까, 정말 짧은 시간 생각이 정리되고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 하느님께 고정했을 때 두려움이 없어진 것이죠.
▶성심당에 대한 직원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사랑을 많이 하는 사람을 우선으로 승진시킵니다. 인사 고과의 40%를 차지하고요. 어떻게 하면 사랑을 할까, 생각하면서 근무를 하는 것이죠. 분위기도 좋아지고 장기 근속자도 늘고요. 사랑을 공유하니까 안 될 것이 없더라고요.
▶분배와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성심당의 경영에 주목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평신도 영성운동인 포콜라레를 창설한 끼아라 루빅께서 1991년에 ‘모두를 위한 경제’라고 EoC를 제창하십니다.
EoC는 경제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사람들과 부를 함께 나누고 성장하는 것이죠. 가난한 사람이 동정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함께하는 그런 경제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커지면 결과적으로 부유한 사람도 망하게 됩니다. 나누면 내 것이 없어져야 하는데 성령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더 커져서 돌아온다는 것을 저희가 체험하고 있습니다.
▶나눔 경영을 실천해 공유경제의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는데요. 대전에만 머무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요.
능력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잘 된다고 확장하는 것만이 정상적인 방법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심당이 대전에만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일부러 대전도 와 보고 대전 시민들도 외지에서 손님이 오면 아주 자랑스럽게 설명해줍니다.
이 집은 오래됐고, 가톨릭 신자이고, 신선하고, 좋은 일 많이 하고…. 저희 제품을 선물하면 그렇게 반가워한대요. 어렵게 대전에서부터 사 왔느냐고…. 저희가 서울과 부산에 있으면 그런 인사를 못 듣잖아요. 그렇다고 적게 판매되는 것도 아닙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하셨을 때 성심당에서 제공한 빵을 드셨죠.
네, 빵집 60년 동안 가장 영예로운 일이었습니다. 교황 방한 사절단이 우연한 기회에 저희 빵을 드셨고 성심당의 정신을 들었나 봅니다. 그게 계기가 돼서 교황님 식탁에 저희 빵을 올리게 됐습니다.
빵 배달은 007작전 식으로 했었죠. 하나의 에피소드라면 교황님께서 바티칸에 가실 때 직원들한테 선물하신다고 저희 초콜릿을 가지고 가셨는데, 제가 정말 감동했던 것은 교황님께서 초콜릿값으로 100유로를 주고 가신 것입니다.
▶교황청으로부터 ‘성 대 그레고리오 훈장’도 받으셨죠.
평신도가 받을 수 있는 제일 큰 상이라고 들었습니다. 교황님을 지키는 기사죠. 영광이었습니다. 아마 하느님 뜻에 맞는 사업을 한다고 평가를 잘해주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일할 때 큰 격려가 되는 부분이고요. 가보(家寶)로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성심당은 다른 동네 빵집과 비교해 보면 거대한 공룡 빵집인데요. 요즘 동네 빵집들이 어렵습니다.
아버님도 아무것도 없이 초라하게 시작했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요. 극복하고 참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려운 시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틀림없이 좋은 때가 있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포기하고 짜증 내고 그러면 결실을 볼 수 없다고 봅니다.
많은 분이 저희 빵집에 배우러 오시는데 마지막 결과보다는 중간에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성공의 관건이 될 것 같습니다. 어려울 때 힘내시고요. 저희보다 더 멋지게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요즘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많은데요. 이들에게 꿈과 희망의 말씀 부탁합니다.
드라마를 보면 파티시에(patissier)가 굉장히 멋진, 꿈의 직업으로 다뤄집니다.
그러다 현장에 와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힘들어서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직원들이 꽤 많은데요. 어떤 동화적인 환상보다 빵과 노동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직업을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파티시에의 모습만 생각하고 온 직원들은 대부분이 어려움을 겪는데 힘든 노동에 대한 존엄성을 자기 스스로 부여해야 한다고 봅니다.
▶두 분은 요즘 어떤 기도를 하시나요.
우리가 빵 장사를 하지만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싶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게 있으면 더 완벽하게 해서 좋은 사례를 만들고 이웃들이 저희 이상으로 잘 돼서 세상을 좋게 만들고 싶다는 것이 목표입니다.
또 60년을 맞으면서 저희와 함께했던 무수한 은인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완성품이 아니잖아요.
방송 시각
TV : 17일 오후 7시, 18일 오후 11시, 19일 오전 8시
라디오 : 14일 오전 7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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