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 자료

천주교 성지인 함평이씨 집성촌

dariaofs 2017. 5. 15. 04:30

 

 

                      ▶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 함평이씨 함성군파조 입향조 집성촌 전경. 무한정보신문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골리는 함평이씨 함성군파 대흥현감 이공(李恭 시조의 12世孫)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미리내(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이민식( 입향조 이공의 13世孫 1829~1921, 빈첸시오)의 본향이 고덕 몽곡리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교회사연구소가 발행한 <교회와 역사> 4·5월호 이민식 빈첸시오 삶과 신앙 행적을 통해 알려졌다.

 

천주교 순교자 유적답사회가 수년 동안 이민식의 신앙행적을 추적해 얻은 결론은 1846916일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교우들이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 두차례에 걸쳐 가매장한 것을 이민식이 용덕을 발휘해 경기도 양성면 미리내로 옮겨와 그의 선산에 묘를 만들고 안장했다는 사실이다.

 

이후 이민식은 선교사 오메트르 신부의 복사가 됐고, 온갖 박해를 겪었다. 92세로 사망한 그는 미리내 성지 김대건 신부 묘역 왼쪽에 묻혔다.

 

이민식의 할아버지 이유종은 입향조 이공의 11대 손으로 몽곡리 지역에서 300년 가까이 세거해온 함성공파 진원계 9대째 종손가의 장손이다.

 

이민식의 사촌인 이돈호(1831~1871)는 병인박해 때 처형돼 서소문 밖 순교성지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탑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료출처 : 무한정보신문)

 

 

고덕면 몽곡리 함평이씨

곽호제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yes@yesm.kr

함평이씨(咸平李氏)는 고려초 신무위대장군(神武衛大將軍)을 지냈고 함풍군(咸豊君)에 피봉된 이언(李彦)을 시조로 모시며, 전라도 함평(咸平)을 본관으로 삼았고 함풍이씨(咸豊李氏)로도 일컫는다. 고려시대까지 두 현으로 나뉘어져 있던 함풍(咸豊)·모평(牟平)을 1409년(태종 9) 통합하여 ‘함평’이라 하였다.

『함평이씨족보』에 나타난 묘소의 위치를 보면 함평이씨는 10세 이극명(李克明)까지는 전라도 함평과 나주(羅州) 지역에서 세거하다가, 11세 이종생(李從生, 1423~1495)이 중앙 관직에 나아가면서 한양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종생은 무과 급제 후 신숙주(申叔舟)의 군관으로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되었다. 그후 한성좌윤(漢城左尹)·충청도병사 등 다수의 관직을 역임한 후 ‘장양(莊襄)’의 시호를 받았고, 함성군(咸城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함성군파’라고 일컫는다.
 

함평이씨의 고덕(古德) 입향은 1500년대 초 이종생의 차자(次子) 12세 이공(李恭)이 대흥현감을 지내면서 비롯되었다. 이공의 묘소는 광주 감천리에 있었으나, 2004년경 고덕 원다기(元多歧)로 이장하여 본래부터 있었던 숙인(叔人) 선산김씨(善山金氏)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선산김씨 묘소의 왼편에 조선전기의 양식으로 새겨진 묘표(墓標)가 있다. 전면에 ‘叔人 善山金氏之墓’가 새겨져 있으나 뒷면은 마모가 심하여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대흥현감 이공·숙인 선산김씨 묘소 및 김씨 묘표.

이공[大興公]을 비롯하여 그의 자손들 묘소가 대부분 고덕면 몽곡리에 있다. 이 마을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덕산현 고산면(高山面)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지금도 ‘高山[높은뫼]’로 불려지고 ‘몽곡(夢谷)’은 ‘꿈 마을’ 또는 ‘굼실’로 해석된다. 또한 ‘원다기(元多歧 :족보에 표기)’라고도 하는데 산의 지형이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갈라진[西發東進] ‘多’자형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령이 500년 가까운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안쪽에 재실(齋室) 택사재(澤思齋)와 종택이 있고, 남쪽 산자락에 대흥공 부부의 쌍분(雙墳)이 동향(東向)으로 있다.

함평이씨는 11세 이종생까지는 주로 무관으로 활약하였지만 12세 이공 이후 대대로 문관이 배출되었고, 특히 조선후기 정계를 주도하던 호서(湖西) 지역의 사림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16세 이영원(李榮元, 1565~1623, 龍溪)의 묘표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그의 사위가 명곡(鳴谷) 이산보(李山甫, 韓山李氏)의 손자 이준발(李畯發)이다.

17세 이초로(李楚老, 1603~1678)의 묘갈을 외손자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지었고, 그의 아들 이지익(李之翼, 1625~1694)은 문과 급제 후 대사헌·대사간·형조판서·한성판윤 등의 요직을 지내면서 조정에 있던 40년 동안 정국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시세에 굴하지 않고 자기 신념대로 시종일관하였다. 이초로의 사위는 영상 이경여(李敬輿)의 아들 목사 이민장(李敏章), 권상하의 부친 집의(執義) 권격(權格), 윤운거(尹雲擧)의 아들 사의(司議) 윤섬(尹掞), 곽지흠(郭之欽)의 아들 도정(都正) 곽창징(郭昌徵) 등이다.

16세 이춘원(李春元, 1571~1634, 九畹)은 영평(永平)에 은거해 있던 사암(思菴) 박순(朴淳)을 사사하여 사마·문과에 합격한 후 요직을 거쳤으나,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과 인목대비(仁穆大妃) 존호(尊號) 폐지에 항론하다가 파직되었다. 그의 신도비문을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지었고, 사위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가 글씨를 썼다. 그는 ‘삼옥(三玉)’이라 불렸는데, 시(詩)와 품성[心]과 용모[貌]가 옥과 같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한편 함평이씨 대흥공계 일부에서 천주교 신자가 다수 배출되었다. 최초의 사제(司祭)인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1846년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신부의 시신을 안성 미리내의 문중 선산으로 옮겨 안장한 17세의 젊은 청년 이민식(李敏植, 1829~1921, 빈첸시오)이 이진원(李震元)의 후손이다. 이민식의 사촌 이돈호(李敦浩)는 병인박해(1866) 때 처형되었는데, 서소문 밖 성지에 세워진 순교자현양탑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또한 이장원(李長元)의 7세 손녀 이시임(李時壬, 1782~1816, 안나)이 을해박해(1815) 때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하였고, 그의 오빠 이유진(李儒震, 요한)과 남동생 이유정(李儒定, 요한)도 전라도 고산에서 관원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순교하였다. 이시임은 2014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諡福) 선언으로 탄생된 124위 순교복자의 한 사람이다

 

함평이씨 종친회 대표카페(hammlee family representative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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