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17일(수) 전남일보(제6600호) 게재된 내용입니다
함평이씨 시조 이언(李彦)의 묘
- 평지혈이지만 발복이 큰 학 명당 -
함평이씨(咸平李氏)의 시조는 이언(李彦)이다.
이언은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건국할 때 참여하여 신무위대장군(神武衛大將軍)에 올랐고, 함풍군(咸豊君)에 봉해졌다.
이로써 함평이 함평이씨의 발상지(發祥地)가 됐고, 그 후손들이 함평을 관향으로 삼게되었다.
고려 때는 함풍현(咸豊縣)이었으나, 조선 태종 9년(1409)에 함풍현과 모평현(牟平縣)을 병합하여 함평현으로 개칭됐다. 그래 고려 때는 함풍이씨라 했고, 조선시대부터는 함평이씨로 부르게 됐다.
함평이씨 대동보에 의하면 함평이씨 족보는 매우 일찍 편찬되었다. 구초보(舊草譜, 1권)를 편찬한 것이 1633년이다.
우리나라에서 체계적인 족보는 조선 성종 때(1476) 안동권씨의 족보가 가장 먼저 편찬됐고, 오늘날의 내용체계로 편찬된 족보는 문화유씨 족보로 조선 명종 때(1560) 편찬되었다.
그 다음이 함평이씨 족보인 것으로 짐작된다. 족보가 일찍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조상을 중시하고 가세가 탄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뼈대가 있는 문벌의 집안이었음을 알수 있다.
함평이씨 대동보를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첫째는 시조가 득관조(得貫祖)가 되고, 기세조(起世祖)가 되어 그로부터 세계(世系)가 실전되지 않고 대대로 이어오고 있다.
둘째는 대부분의 성씨들이 시조의 묘를 실전하고 설단으로 모시고 있는데, 천년이 넘은 시조 묘를 성역으로 수호하고 있다.
셋째는 시조의 11세손에서 20여 지파가 동시에 분파된다. 이런 점들은 다른 성씨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함평이씨가 혈족의 원류와 가통의 계승이 정통함을 보여준 것이 된다.
이언의 묘소는 함평군 함평읍 성남리 산 793-3번지에 있다. 함평농업고등학교 정문에 서 무안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우측 길가에 있다. 길에서 보면 ‘우측에 시조의 재실 경모재(景慕齋)가 있고, 좌측에는 함평이씨시조산‘이라 음각된 비석이 서있다.
묘의 뒤쪽에는 이 지역에서는 높은 감방산(坎方山·257m)이 솟아있다. 이 산에서 분맥한 지맥이 기세 있게 진방(震方·동쪽)으로 내려와 평지낙맥(平地落脈)했다.
낙맥한 용맥이 낮은 기복을 하더니 방향을 이방(離方·남쪽)으로 틀어 굴곡과 위이(違迤)를 하고 결인속기(結咽束氣)를 거쳐 입수도두(入首到頭)하여 혈장을 결지하였다.
용맥이 섬세한 변화를 하더니 평지혈락(平地穴落)한 것이다. 평지의 미미한 돌출 부분에 혈이 결지했다. 이런 평지에 맺은 혈이라 하여 발복이 작은 것은 아니다.
이곳처럼 주룡이 분주하게 변화를 하고, 혈의 조건을 갖춰서 산천정기인 음양생기가 잘 취기 되면 대혈을 결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의 혈처럼 주변의 산들이 모두 낮으면 혈도 낮은 곳에 있게 된다. 이런 혈을 지혈(地穴)이라고 한다. 낮은 산이 마치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면세(面勢)라고도 한다.
지혈은, 낮은 산세에서는 생기가 낮은 곳에 모여 융결되므로 낮은 곳에 결지한다. 지혈에는 현유혈(縣乳穴)과 장구혈(藏龜穴)이 있다. 현유혈은 용이 평지에 다다라 용맥이 마지막 멈춘 지점에 결지한다.
혈이 용 끝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구혈은 용맥이 은맥으로 행룡하다가 거북이 등처럼 약간 볼록한 부분에 결지한 것을 말한다. 이곳의 혈은 현유혈에 속한다. 평지에 맺은 대혈이다.
이 현유혈의 형국은 천년을 산다는 학이 논밭으로 내려오는 선학하전형(仙鶴下田形)의 혈로 전해지고 있다. 학과 관련된 명당은 성격이 고고하고 인품이 훌륭하며 학문이 출중한 자손을 배출한다.
그래서인지 이씨 가문에서는 시조 이래로 문과 급제자 73명을 배출했고, 현대에 와서도 장관 5명, 국회의원 10명 등이 가문을 빛냈다.
성품이 강직한 한 후손이 있었다. 이덕일(李德一·1561~1622)이다. 선조 25년(1592)에 무과 급제하였고, 한 때 충무공 이순신 막하에 있다가 후에 절충장군(折衝將軍·정3품으로 지금의 소장급)이 된 인물이다.
시조 당쟁상심가(黨爭傷心歌, 28首)로 유명하다. 조선의 국운을 병들게 했던 당쟁을 슬퍼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심정을 읊은 노래다. 구구절절이 애국충정이 녹아든 시들이다. 한 수만 풀어서 소개한다.
“싸움만 일삼고 국사의 옳고 그름을 밝히지 않네./ 어찌하여 오늘의 나라가 이같이 되어버렸는가./ 물난리 불난리보다 더 무서운 환난이 길어만 가는구나.”
이 묘소를 답사한 것은 이번까지 세 차례다. 이번에 가보니 묘역의 모습이 확 달라져 있었다.
2007년에 기성군파(箕城君派) 종회에서 건립한 함평이씨발상지 기념비를 구경하고 묘역에 들어서니, 곡장(曲墻·묘 둘레의 담장)도 새로 구축됐으며, 묘역의 잔디도 새롭게 조성돼 있었다.
임좌병향(壬坐丙向·남향)으로 용사된 봉분 가까이에는 묘비,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이 세월의 이끼를 머금은 채 평온하게 서있다.
묘의 품격을 더해 준다.
그런데 망주석이 너무 밖으로 나가있다. 망주석은 곡장의 양쪽 끝자리에 맞춰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망주석은 묘원의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상징물이다.
시조 묘소를 이만큼 정성들여 관리하는 문중도 드물 것이다. 묘역을 둘러볼수록 영영세세로 후손의 번창이 엿보이고, 그들의 숭조사상도 돋보인다.
이미 천년의 세월과 함께 수호해 온 성지가 아닌가.
정녕 만년향화지지(萬年香火之地)가 될 건가
-정통풍수지리연구가-
함평이씨 종친회 대표카페(hammlee family representative cafe)
cafe.daum.net/hamm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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