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지를 궁리하였다고 복음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왜 그렇게 집요하게 예수님을 물고 늘어질까요?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하셨기에 그럴까요?
뭔지는 몰라도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의 아픈 곳을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리사이들이 가진 콤플렉스
즉 그들이 숨기고 싶은 것을 주님께서 직설적으로 건드리셨기 때문에 악의를 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누가 어떤 것을 물어도 다 말해줄 수 있어 하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의 치부인 콤플렉스를 건드린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참으로 괴롭고 힘들 것이고 그 사람을 만나기 싫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아픔을 통하여 자기성장을 이루려고 합니다.
상대방의 아픈 지적을 쓴 약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건드렸을 때
그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실제로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 경우인데
이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인가?
양육자, 즉 부모로부터 잘못된 양육을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자연스런 삶의 활기는 바깥세상에서 자기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생깁니다.
즉 아이들은 세상이 친절하다고 생각하면서 어린아이다운 삶을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이런 자연스런 낙천주의와 믿음은 양육자에 의해서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본능계산시스템이란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처신하고 방어하고 생존하는 방법들을 생각하는 시스템입니다.
시리적 방패입니다.
아이들은 이것이 갖추어 지지 않은 상태라서 어떤 면에서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양육자가 아이를 무시하거나 창피를 주었을 때
아이는 자기를 방어하지 못하고 방패가 없어서 창에 찔리는 것처럼 심리적으로 죽어버립니다.
신뢰심을 가지고 낙천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점점 약해져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경쟁적이고 불안정한 성격이 되어버리고
이런 양상이 반복되면 비관적인 사람이 되어서 희망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고
급기야 자기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이용해야 한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힘을 생겼을 때
자신의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사람을 만나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바리사이들이 바로 전형적인 이런 경우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문제를 아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자신들의 율법 지식으로 무지한 백성들을 지배하고 괴롭히면서
어린 시절 자신들이 당한 모욕감을 보상받으며 쾌감을 느끼고 있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깊은 치부를 건드리는 예수님이 참으로 거북한 존재이고
죽여버리고 싶은 존재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들이 심한 정신질환 환자들임을 아셨기에 한편으로는 깊은 연민을 가지고 대하셨습니다.
기꺼이 그들이 품은 복수심의 희생양으로 당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 한을 풀어주고픈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다보면 이상하게 나의 단점
곧 나의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안 좋은 것이 정상입니다.
그 정도가 지나쳐 상대방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가진 마음의 상처가 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대방을 죽일 생각을 먼저 할 것이 아니라 자기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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