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성경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하느님이 가장 하고 싶어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이 두 가지입니다.
그것도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전폭적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였다. 혹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였다고 고해성사를 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웃사람이 아프면 내 몸도 아프던가요?
이웃사람이 힘들 때마다 가서 위로해주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이웃사람이 돈을 빌려달라고 왔을 때 선뜻 돈을 내주게 되던가요?
하느님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하루종일 하느님만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던가요?
좋은 일이 아니라 궂은 일, 남편사업이 안된다거나 아이가 입학시험에 떨어졌다거나 할 때에도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나요?
이번에는 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아이가 자기가 가진 것을 다른 아이들에게 다 주고 다닌다면 부모님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들까요?
만약 아이가 힘들게 사는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밥도 못 먹고 늘 침울한 표정으로 다닌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만약 여러분의 아이가 하루 종일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산다면서 다치고 깨지고 손해 보아도 늘 감사하다고 한면서 피를 질질 흘리고 산다면 부모 마음이 어떨까요?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키지 못할 무리한 요구를 하실까요?
그것은 우리 인생의 이상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자기만족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불만스러우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나치게 자기만족에 빠지면 자아도취라는 또 다른 부작용이 생깁니다.
물이 흐르지 않고 오랫동안 고여 있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과 같은 부작용입니다.
이물질들이 가라앉아서 물이 고요해보이지만 흐르지 않기 때문에 썩어 악취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영성생활의 목표를 제시한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을 인생의 목표로 삼되, 완전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산맥 중에 가장 높은 산에는 천년설이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 보면 참으로 아름답다고 하지요.
그러나 산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세상살이에 몰두하다가 가끔 산봉우리를 보면서 위로받거나
절반정도 높이까지 올라가서 경치를 볼 수 있을 뿐입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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