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것은 참으로 희한 합니다.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통치권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나라의 형편이 달라지니, 결국은 대통령의 됨됨이가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는 것이 힘들면 구관이 명관이니 하는 말들을 하게 되지요
여러분을 옛날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어느 시절로 가고 싶으십니까?
어떤 분이 나라를 다스릴 때로 가고 싶으십니까?
대게 나라님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시절로 가고 싶어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입니다.
왜 메시아 신앙이란 것이 생겼는가?
이스라엘리 가장 당성했던 시절은 다윗과 솔로몬왕, 두 왕정 때뿐 입니다.
그 이전에는 각 지역별로 부족장들이 통치하여서 나라의 힘이 분산되어 있었고
솔로몬 이후에는 그릇이 작은 아들들의 권력욕이 나라를 두 동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로마에 점령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옛날 다윗과 솔로몬 시절을 그리워하다 못해,
나중에는 아예 그것을 자신들의 신앙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살만하게 해준 다윗왕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타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시 예전의 잘나가던 시절처럼 살게 해준 것이라는 간절한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대감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스스로를 예언자니 메시아니 하면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갈취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메시아 같다고 하면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착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짜였으면 하는 기대감과 가짜인지도 모른다는 의심 사이에서 마음들이 싱숭생숭하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기까지 보여주신 행적은,
사람들이 바라는 메시아의 삶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이셨기에,
사람들의 분노를 사셔서 그런 죽음을 맞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어찌되었건 사람들의 실망감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행적은 초지일관이셨는데,
가끔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메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너희는 사람을 제대로 보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아주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를 시원찮은 사람이나 이상한 사람으로,
별 볼일 없는 사람, 혹은 그냥 몇 년 있다가 갈 사람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제 기분이 어떨까요?
본당을 위해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싶을까요?
제가 가진 기량을 다 발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까요?
아니겠지요.
이번에는 여러분을 예를 들어보지요.
만약 배우자가 여러분을 그저 시원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대한다면
배우자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을까요?
절대로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나 혹은 당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해주지 않으신 것은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제대로 보아줄 때에 나도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내용입니다.
즉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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