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오늘은 재물을 다루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얼핏 듣기에 하느님과 재물을 병립할 수 없는 가치로 완전히 분리하시는 듯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제활동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건강을 돌보며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너무 극단적인 요구로 들립니다. 실제로 어느 한 편만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섬기다"라는 단어에 주목하면 의혹이 풀립니다. 하느님은 섬김을 받으셔야 마땅한 존재시지만, 재물은 하느님과 사람을 섬기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에 불과하니까요. 문제는 이 질서가 뒤바뀌거나 동일선상에 놓일 경우 발생합니다.
자칫 재물을 쌓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하느님을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고, 하느님을 팔아 자기 영광을 구축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하느님과 재물 사이를 박쥐처럼 오가며 필요에 따라 이득을 취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 우리는 목적과 행동을 제대로 연결시켜야 합니다. 곧 우리는 하느님을 섬겨야 하고, 재물은 우리를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31.34)
오늘 복음 대목에서 세 차례나 반복되는 이 말씀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어조, 톤, 높낮이, 표정에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풍진 세상에 던져진 자녀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위로, 격려가 가득합니다.
당신의 든든한 품을 내주시어 힘껏 품으시며 속삭이시는 듯합니다. 다 괜찮을 거라고, 그저 당신만 믿고 따라오라고 다독다독 힘을 주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6,30)
문제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 나의 안위를 염려하시고 손수 챙기신다는 믿음,
설령 삶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미처 모르는 하느님의 계획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우리 존재 안에 확고히 자리잡기까지 예수님의 이 안타까운 탄식은 계속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섬기면 은총과 사랑이 따르고, 재물을 섬기면 걱정과 근심이 따릅니다. 혹독한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지요. 결국 우리가 찾고 추구해야 할 바는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 그분만을 원할 때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 존재와 삶과 역사에서 실현되고, 이는 우리에게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자랑"이 계속됩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엄청난 신비적 은총을 "어떤 사람"(2코린 12,2)의 것으로 서술하면서 관심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침묵이 요구되는 이런 류의 신비체험을 그가 굳이 드러내 "자랑"하는 이유가 자기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걸 독서 후반부에서 깨닫게 됩니다.
그는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신에게 "가시, 사탄의 하수인"(2코린 12,7)이라 일컫는 결정적 약점이 자리하게 된 사실을 솔직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약점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의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만, 여러 서간들에 언급되는 문맥과 연결한 추측에 기인할 뿐이어서 딱히 무엇이라 명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그가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할 정도로 그토록 간절히 떼어버리고 싶어했다는 대목에서, 사도의 위상과 업적과 성품에 흠집을 낼 수 있었던 부분이리라 짐작을 하게 됩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사도 바오로의 근심, 걱정을 모르실 리 없으신 주님께서 이처럼 거절의 응답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가만히 머무르다 보니 얼핏 냉정하게 들렸던 것이 실은 "걱정하지 마라." 하고 안심시켜 주시는 어조로 바뀌어 들립니다. "괜찮다"는 뜻이 담긴 위로와 격려로 말이지요.
하느님 은총의 최대치와 자기 약함의 최대치를 한 존재에 떠안은 사도는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이제 자기 약함에 개의치 않고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2코린 12,9)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단순한 반전에는 사도의 굳은 믿음과 신뢰가 깔려 있습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약함 때문에 자기가 설령 손가락질과 조롱을 받을지라도, 그 덕에 그리스도의 힘이 더욱 드러나고 그분께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신다면 사도는 부끄러움도 실망도 잊고 더 약해지고 더 작아지고 더 초라해지겠다고 합니다.
그의 목적이 자기가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오늘 예수님 가르침처럼 하느님을 철저히 섬기고 재물을 영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임을 알겠습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지식, 능력, 재능, 열정은 물론 약점까지, 꽁꽁 감추고픈 수치스런 약점까지, 그야말로 자기의 모든 재물을 다 동원해 하느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과연 재물은 이렇게 써야 본연의 질서를 찾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가 가진 모든 유형 무형의 재물로 하느님을 섬길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근심 걱정을 없애 주시고 당신의 힘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은총을 넉넉하고 충분히 받은 우리에게 이제부터 "걱정"은 소소한 악습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 은총을 부정하고 그분의 돌보심과 말씀을 불신하는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벗님이여, 걱정은 붙들어 매고 믿기만 합시다! 믿는 이에게만 효력이 발생할 축복을 벗님에게 전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화답송)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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